올라갔으면 내려가야죠.
오랜만입니다. 거의 3주 가까이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 업무적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잠시 글럼프(?)가 왔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올해의 막바지에 와 버렸네요. 그러다 문득, 본격적으로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올해였음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모 포털의 글쓰기 플랫폼이 20주년 기념 캐치프레이즈로 '기록이 쌓이면 뭐든 된다'라는 문장을 내세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와닿는 얘기였습니다.(아마 다른 글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다시 정신 차리고 글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제가 전달하는 능력과 그 내용이 아직은 부족하지만, 계속 쌓이면 뭐든 되지 싶습니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하하.
서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그동안 글쓰기를 안 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감사합니다.'입니다. 각설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올해의 Detour 시리즈는 아마 마지막이지 싶습니다. 내년부터 다시 쓰겠지만, 올해의 마지막인 만큼 한번 복기하고 내년을 생각해 보는 내용으로 채워보고자 합니다.
올해의 1분기가 기억나시나요? 작년 하반기에 이어졌던 급격한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빅스텝도 아닌 자이언트 스텝이라 불리던 초고속 기준금리 인상으로 생겼던 일들이 생각나십니까? 바로 경기침체 우려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나 돈의 힘을 우습게 본 것이었는지.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만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바로 SVB 파산으로 대표되는 미국 중소 상업은행들의 부실화였습니다. 덕분에 글로벌 시장금리는 빠르게 내려갔고, 유가도 하락세를 이어갔습니다. 미국의 제조업 지표는 꺾였습니다. 다들 통화긴축 정책의 여파로 경기 침체가 시작되리라 믿었고, 주가지수도 하락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굳건히 버틴 친구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서비스업 경기입니다. 다들 경기침체를 걱정할 때, 서비스업은 튼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돈을 펑펑 쓰니까요. 미국 고용시장은 서비스업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지원군이었습니다. 사장님들은 직원을 고용하기 너무 어렵다 보니, 일이 없어도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연한 미국 고용시장에서 말이죠. 연봉은 치솟았고, 직원들은 코로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재택근무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힘은 몇 년간 받아온 코로나 지원금을 기반으로 한 초과저축이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죠. 제대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뒤통수를 때렸습니다. 이 결과는 물가로 나타났습니다. 꺾여야 할 물가가 꺾이지 않으니 중앙은행들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넘버원 Mandate가 물가안정이기에 경고를 날렸습니다. 확실치 않아도 일단 경고를 날렸죠. Rear-view based monetary policy라고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니까요. 꿋꿋했고, 결국 그들이 옮았습니다. 경기는 사실 좋았던 것입니다. 주가가 재빨리 이를 반영해서 하락폭을 다 회복하고 최고치를 향해 돌격합니다. 금리도 재차 내려왔던 것을 되돌립니다. 달러화는 끝이 어딘지 모르게 강세를 보입니다. 1분기는 다 뻥이었어!라고 말하며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 와중에 미국의 국채 발행량 증가가 시장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물량을 감당할 자신이 없던 시장은 결국 채권 가격을 내려버립니다. 채권을 보유하는데 더 높은 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바로 텀-프리미엄 논란입니다. 기준금리는 그 사이 더 올리지 않습니다. 초과저축이 다 끝나간다는 신호가 나옵니다. 이민자도 유입되면서 타이트해서 죽을 것 같던 고용시장도 아주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정책 당국자들은 마치 쓰러진 보스 몬스터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용사들처럼, 바짝 긴장된 눈을 유지하면서 좀 지켜보자고 합니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적자에 질려버린 금리가 먼저 튀어 오릅니다. 저 많은 발행량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높아지는 금리와 초과저축 소진이 맞물리면서 미국의 경기주체들이 다 쭈그러들기 시작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시장의 자정작용입니다. 금리가 높아져서 개인도 대출을 줄이기 시작하고, 기업도 투자를 주저합니다. 하지만 경기지표는 여전히 관성을 가지고 좋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주가도 다시 하락합니다. 'Good is bad.' 좋은 경기지표는 더 이상 주가에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좋은 경기지표는 기준금리만 더 올릴 명분만 줄 뿐이지, 누구도 반기지 않습니다.
유가는 여기에 기름을 부어 버립니다. 추가적인 감산은 유가를 다시 90불 근처로 보내 버립니다. 빈 살만의 작전은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중국만 좋았다면 말이죠. 중국의 부동산이 난리가 났습니다. 중국 부동산 업체들의 채권에서 EOD가 펑펑 터져 나옵니다. 덕분에 중국의 경기가 부활하지 못하고 유가 수요 또한 받쳐주지 못합니다. 미국도 이제 돈을 다 썼는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높아진 유가는 물가만 자극해 버립니다. 드디어 바라마지 않던 수요 감소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재정확대도 브레이크가 걸려 버립니다. 또다시 셧다운의 시기가 왔습니다. 내년 미국 대선도 앞두고 있는 만큼, 내년 예산을 확대해 줄 리가 없습니다. 3분기 발행규모를 시장에서 소화하기 힘들다는 소식도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결국 4분기 발행은 영향이 적은 단기물 중심으로 구성합니다. 숨통이 조금 트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미국 대규모 자동차 파업으로 고용시장이 크게 한번 출렁입니다. 일종의 계기가 된 셈이죠. 더 이상 고용시장이 타이트함 일변도로 가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파업이 고용시장 수요증가의 막을 내려버린 셈이니까요. 아무튼 초과저축 소진과 고용시장의 둔화를 시장은 크게 받아들입니다. 4분기를 지나면서 시장금리는 하락으로 바뀝니다. 통화정책 당국자들 또한 높은 금리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기는 척합니다. 사실은 기준금리가 할 일을 대신해 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여하튼 덕분에 경기지표도 둔화로 바뀝니다. 말은 제대로 하지 않지만 더 이상 인플레이션 파이팅은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시장에 넓게 퍼집니다. 그동안 채권 시장을 괴롭혀왔던 텀-프리미엄은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미국 채권금리는 4개월 동안 올렸던 금리를 2개월 만에 다 돌려 버립니다. 주식은 이제 Bad is Good입니다. 나쁜 경제지표는 통화정책 우려를 덜어주면서 주식시장을 기쁘게 합니다.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만 하던 달러화는 약세로 전환하더니 연고점과 연저점의 중간지점을 가볍게 하향돌파 해버렸습니다. 유가도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오랜 감산으로 피폐해진 산유국들은 더 이상 감산을 원하지 않습니다. 추가 감산을 논의했던 사우디가 한발 물러섭니다. 이런 모습은 바로 유가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90불 넘어 100불로 날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유가는 이제 70불 공방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 위주로 얘기했습니다만, 국내도 한번 살펴볼까요. 사실 올해 국내는 대외요인이 지배했습니다. 반도체만 제외하고 말이죠. 사실 반도체도 대외요인이 주가 되기는 합니다만.
올초 정부의 경기전망은 상저하고였습니다. 맞았습니다. 상저하고였습니다. 주로 반도체 사이클에 의한 흐름이었습니다. 문제는 저와 고의 폭이 다르게 나타나는 점입니다. 하락폭은 생각보다 큰 것 같고, 고는 생각보다 높지 않습니다. 다른 변수가 더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수경기가 그 폭을 좌지우지했습니다.
IRA 법안으로 대표되는 니어쇼어링과 리쇼어링은 우리나라와 같이 중국에 대한 경기 의존도가 높은 편이고, 주로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들에게 의외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소비가 제대로 돌아가는 거의 유일한 나라인 미국의 주요 수입선은 이제 중국에서 멕시코로 바뀌었고, 주요 투자는 멕시코와 미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국내 투자는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추가로 레고래드 사태 이후로 위축되어 버린 부동산 시장은 PF를 중심으로 올 한 해 내내 투자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주택시장은 하락 이후 잠시 반짝했지만, 다시 지지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투자가 멈칫거리면서 소비도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한류 문화에 대한 열풍으로 늘어난 해외관광객들의 국내 소비 증가도 잠깐일 뿐이었습니다. 더 심해져만 가는 양극화와 노령화는 소비 위축을 더 가속화시키는 요인입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이에 대해 구조개혁 필요성을 거의 출마하시는 분처럼 열변을 토해내셨죠. 사실 한은 총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기 쉬운 일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 이긴 합니다.
모든 것이 높은 산 다음에 나타나는 깊은 골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올해 금융시장을 한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으로 훅 훑어봤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올해 시작은 경기침체 우려와 기준금리 인하 프라이싱으로 시작해서 한해 내내 그것을 되돌렸다가, 올해 말이 되니 다시 경기둔화와 기준금리 인하 프라이싱으로 돌아왔다는 거죠. 올해 초엔 아무도 올해 중반과 같은 일을 생각하지 못했고, 누구도 3분기에 올해 말과 같은 모습을 전망하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내년은 어떻게 될까요? 올해를 생각해 보면 지금 내년을 생각해 본다는 사실이 우습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틀린 줄이라도 있어야 그걸 고쳐가면서 잡고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 더 시계를 넓혀서 생각해 보죠. 코로나가 세상을 덮치면서 급격한 수요감소와 공급 부족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코로나가 조금 걷히자 모든 정부가 돈을 펑펑 쏘아대면서 수요를 살렸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 글로벌 공급체인 이상이었습니다. 공급 사이드가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공급에 집중했더니 공급의 회복은 어찌어찌 이루어냈습니다만, 고용시장 폭발이라는 부작용이 나왔습니다. 다시 수요가 늘어나버린 거죠.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연준의장 시절 고안해 낸 메커니즘인 'High Pressure Economy', 즉 항상 수요가 공급을 앞서는 고압경제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래 그림은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 추이입니다. 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화 추세 강화와 점차 낮아지는 노동생산성은 디플레이션 우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임의로 그린 장기추세선을 상당기간 하향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옐런 당시 연준의장이 고안한 것이 고압경제론입니다. 인플레이션 회복을 위해 높은 유동성과 통화완화정책을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더라고 한동안 유지되어야 하다는 것이죠. 그런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고, 옐런의장은 재무장관이 됩니다. 그리고는 꿈은 이루어지죠.
일단 목적은 달성했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도 좀 빠르게 돌아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아직 경기가 좀 더 망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경기를 좀 더 망가뜨리기 위해선 기준금리 인하를 좀 더 천천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2024년은 선거의 해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불확실성은 높을 것 같습니다.
국내는 좀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선거도 상반기로 좀 빠르게 이루어지죠. 확실히 국내 경기는 미국보다 좋지 않습니다. 이유는 중국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경제의존도라는 게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중국이 내년에는 그래도 올해보다 사정이 나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의 중국 경제 부진은 내부적인 권력구조에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계치에 임박해 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에 국내 수출 경기가 회복되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해당 산업분야를 중심으로 회복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내수는 여전히 문제가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를 살리기 위해선 그래도 중립금리 수준으로의 기준금리 인하가 필요한데 다행히 미국도 기준금리 인하 사이클에 들어갈 것 같으니, 국내도 같이 들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계부채 문제가 걸려서 큰 폭의 인하는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전과 같은 낮은 금리 시대는 당분간 어렵습니다.
깊은 골 이후에 적막한 산하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Detour 시리즈를 하면서 유가와 금리같이 Macro 한 부분을 주로 다뤘습니다만, 다루면서 가능한 한 전망은 제외하고 원인 분석과 팩트를 다루어 보려 했습니다. 그래도 투자에 관한 글인지라, 전망이 아예 안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그 전망이 그래도 아예 틀리게 하진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보다 다양한 분야로, 보다 좋은 내용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올해는 다른 글로, Detour에서는 내년부터 다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표지그림 : Unsplash의 Andrew Stapleton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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