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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hole Dec 19. 2023

지하철 역을 나가고 싶으면 줄을 서시오.

평일 여의도역 5번 출구 아침 8시 부근 풍경

  바쁜 출근길에는 원래는 보기 쉽지 않은, 그러나 의외로 매일 벌어지는 진풍경이 여러 가지가 있다. 버스 앞문까지 꽉 끼여있는 승객들, 만원이 될 때까지 가득 차는 엘리베이터, 곡예하듯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가는 사람들... 그중에서 여의도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가끔씩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근자가 많은데, 교통수단이 다양하지 않은 배드타운에서는 해당 교통수단, 이를테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출입구부터 줄을 길게 서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하차한 곳에서도 나가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은 적어도 나로서는 잘 보지 못했다. 물론 여의도 외에는 을지로와 서초에서만 근무를 해보았을 뿐이라 강남이나 광화문, 판교 같은 다른 업무지구에서도 이미 같은 풍경이 매일 아침 펼쳐지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는 쉽게 보기는 힘든 일이다.




  출근시간이 좀 빠른 편인 여의도의 매일 아침 8시 부근, 여의도역은 9호선과 5호선에서 토해진(?) 직장인들로 그득그득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제 일 처음 하는 일은 개찰구를 통과하는 일이고,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지하철역에서 나가야 한다. 여기서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지도를 보자.

  여의도역 사거리에서 업무지구는 크게 지도상 북쪽 지역이 가장 크고, 그다음으로 지도상 동쪽 지역, 서쪽지역이다. 남쪽 지역은 거주구역이다. 북쪽지역에는 주로 증권사 본사들이 자리하고 있고,  IFC와 '더 현대'가 위치한 파크원까지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주요 고층빌딩이 이 구역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출퇴근 직장인들도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지하철 연결 통로도 아주 큼직하고 출구도 2개로 나뉘어 있다. 파크원까지는 무빙워크도 구비되어 있어 유동인구가 많지만, 그래도 원활하게 이동이 가능한 편이다.


  서쪽 지구는 금감원과 전경련 빌딩 등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4~5개 정도의 고층건물이 있을 뿐이다. 초고층 빌딩을 포함해 10개가 넘은 고층빌딩과 또 10개가 넘는 중층빌딩 등이 늘어서 있는 북쪽지역이나, 서쪽 지역대비 2배 이상 넓은 지역을 커버하는 동쪽지역 대비 유동인구가 적은 편이다. 출구는 2개 중에 하나는 공사 중으로 적지만, 크게 붐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주지역인 남쪽은 출근시간에는 붐빌 일이 없다.


   문제가 발생하는 지역은 동쪽 지역이다. 일단 커버하는 지역이 넓다. 초고층 빌딩은 2개 정도로 많지 않지만, 오래된 중형 및 소형 빌딩들이 주욱 늘어선 지역이다. 대형 증권사 같이 1인당 사용면적이 그래도 넓은 편인 직장도 있지만, 적지 않은 숫자의 중소기업들, 개인사업자들, 그리고 소상공인들이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인당 사용면적이 좁은 일자리들이 많다. 당연히 유동인구 또한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런데 지하철 역 출구는 5번 출구 1개뿐으로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유일한 탈출구인 5번 출구는 계단이 없고, 2명이 탈 수 있는 상행선과 하행선 에스컬레이터 2기가 설치되어 있다. 즉, 이동속도가 정해져 있다.


  학창 시절 풀던 수학문제처럼 출근시간 대의 9호선과 5호선에서 분당 유입되는 사람 수와 에스컬레이터의 속도를 고려한 분당 지하철 역 탈출 사람수를 구해볼 생각은 전혀 없다. 한번 경험해 보면 무엇이 빠른지 바로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생기는 신기한 광경이 여의도역 5번 출구를 나가기 위한 줄 서기 광경이다. 개찰구를 나서자마자 맞닥뜨리는 이 줄은 주말 놀이공원 입장 대기줄처럼 몇 번 구불구불하게 꺾인 뒤에 비로소 에스컬레이터에 데려다준다. 지하철에서 나가기 위해 줄을 길게 서는 광경은 마치 대형 이벤트가 있을 때 근처 역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데 이런 드문 광경이 매일 아침 펼쳐지고 있다.


  덕분에 나름 재미지는 일도 있다. 우선 몇 호선을 타고 왔는가에 따라 나가는 속도가 틀리다. 5호선과 9호선의 개찰구는 방향이 다르다. 각자의 개찰구에서 5번 출구로 이어지는 최단거리의 줄을 형성하다 보니 5호선에서는 동시에 2명이 통과할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상행선의 왼쪽으로 향하는 줄, 9호선에서는 오른쪽으로 향하는 줄이 생긴다. 평소 우리는 에스컬레이터의 왼쪽은 빨리 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라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5호선에서 내려서 5번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빨리 나가는 사람이 되고, 반대로 9호선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천천히 올라가는 사람이 된다. 


  처음 여의도역에 내려본 사람인지 아닌지도 금방 구분된다. 일단 역사 내에 길게 줄을 서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게 된다. 그리고 5번 출구를 향해 걸어가 보다가 이내 출구로 이어지는 줄을 확인하고는 황당한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줄의 제일 끝을 찾아 돌아온다. 또 여의도 특성상 타사 사람들과 교류가 많다 보니 구불구불 지나가는 줄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마치 축구경기에서 시작 전에 상대팀과 교차하면서 지나가며 인사하듯이 출근 인사를 건네게 되는데, 반가운 사람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때론 기분이 나쁜 일도 벌어진다. 특히 슬그머니 새치기를 당하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다. 당장 내 앞에서 생긴 일이라면 얘기라도 할 텐데, 몇 번째 앞에서 당하는 새치기를 당사자도 아닌 내가 가서 얘기하기도 애매하다. 그렇다고 새치기로 인해 생긴 불편함은 뒤에 있는 모두가 같이 겪는데,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연로하신 분이라면 몸이 안 좋은가 보다 하고 이해라도 해보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끼어들어 오는 것을 보면 경적을 울려주고 싶을 뿐이다.




  지금은 사람들을 통제하는 관리자가 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에 관리자가 배치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전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줄을 섰다. 사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그 누구의 통제와 지시도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가장 효율적인 '2줄 서기'라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생각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주어진 환경이 좋든 나쁘든 어떻게든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도 매일 벌어지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출근길을 맞이하는 여의도 직장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가능한 한 즐거운 출근길이 되었으면 한다. 매일 같은 길이지만, 그 속에서 작은 재미와 기쁨을 찾아보는 일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동시에 보다 나은 출근길 환경이 만들어 지기를 바라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보자.


  언젠가 이 신기한 모습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두서없는 글이 되어 버렸다. 어쨌든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거다.   

아침 출근길 고생이 많습니다.
다들 내일 아침도 파이팅 하시길.
그리고 내년에도 계속 파이팅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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