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약과 우울증의 상관관계
이 약을 먹으면 기분이 안조크든여
네이버 검색창에 대표적인 피임약 이름을 몇 개 넣어봤다.
야즈, 머시론, 센스데이, 모두 '부작용'이 자동완성된다. 그냥 '피임약'이라고 쳐도 마찬가지다.
피임약은 피임을 목적으로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리 주기 불순, 자궁 질환 치료 목적 등으로 복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부작용을 겪는다. 먹어본 사람은 안다. 열에 아홉은, 아주 높은 확률로, 먹는 순간 '이 구역의 미친 여자'가 된다는 것을...
내가 처음으로 이 구역의 미친 여자가 된 것은 20대 초중반, 자궁내막증 수술을 받은 후 호르몬 치료를 할 때였다. 배에 호르몬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았고, 피임약 중 '야즈'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자궁내막증은 생리를 하면 높은 확률로 재발하는 병이다. 생리를 중단하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휴지기 없이 연속해서 먹었다. 나는 그때까지 약 부작용이란 걸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부작용'이라는 건 미란다 고지처럼 의사들이 으레 해주는 말이고 일어날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했기에 야즈를 처음 먹을 때도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야즈 복용 후 한 달,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건드리면 터질 듯한 풍선처럼, 가슴 속에 화와 짜증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통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정말 돌아버린 것만 같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하루 내내 기분을 망치곤 했다. 극단적으로는 직장 동료가 예쁜 옷만 입고 와도 짜증이 났다. '뭐야, 왜 예쁜 옷 입어...' 나도 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라는 걸. 하지만 그 약을 복용하던 중에는, 매일매일 길을 걸어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제발 누구라도 나에게 시비 좀 털어라... 강냉이 다 털어버릴라니까...'
주체할 수 없는 짜증을 분출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들었던 3개월이 지나고, 다시는 내 인생의 피임약은 없다며 빈 야즈 박스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해방이다 해방!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바로 다음날, 심각한 부정출혈로 집에서 주저 앉고 말았고, 병이 재발한 걸 알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또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수술 따위 두렵지 않았다. 척추마취 까짓거 잠깐 참으면 되고 (사실 대박 무서웠음. 종교도 없는데 기도했다.) 며칠 병원에서 고생하면 된다. 하지만... 하지만... 호르몬 치료는 정말 무서웠다.
이번에는 병원에서 '비잔'을 권했다. 장기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4년이 될지, 그건 모른다고 했다. 얼굴빛이 새하얘졌다가 똥색이 되는 나에게 의사는 '그래도 야즈보단 부작용 적을 거예요'라며 위로했다. (여담이지만 그 의사는 내가 만난 부인과 의사 중 가장 배려 깊었다. 나는 아직도 '나이가 찼는데 임신을 안 하니까 이런 병에 걸리지! 엉! 이라고 타박했던 할배 의사를 잊지 못한다... 부들부들)
비잔 역시 호르몬제이며 생리를 중단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피임약은 아니다. 그래서 좀 나을 줄 알았다. 결과적으론 아니었다. 먹기 몇달 뒤부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했구나.'
비잔 부작용을 검색해보면 우울증, 불면, 체중증가, 부정출혈, 식욕증가, 탈모 등이 나온다.
야즈가 나를 한입에 삼켰다면, 비잔은 나를 천천히 잠식해나갔다. 2년 동안 꾸준히 살이 쪘고, 2년 동안 꾸준히 과수면과 불면을 오갔으며, 2년 동안 꾸준히 우울해졌다. 살이야 좀 쪄도 상관 없다. 나는 이전에도 몸무게에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감정변화'였다.
비잔을 복용하는 동안, 내가 먹는 우울증 약도 한 알, 두 알, 늘어갔다. 수면제도 의사가 허락하는 한도까지 처방받았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그 약이 내 마음을 천천히 병들게 했다. 처음엔 그냥 의욕이 없고, 가슴이 답답한 정도였다. 그러다 점점 내가 쓸모없고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거나 하루 종일 잠으로 지냈다. 결국 일을 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즈음엔 팀원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나는 인생을 총체적으로 망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쉬기로 결정했다.
쉬면 우울증이 나아질까? 그렇지 않았다. 쉬는 동안 상태는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게 모든 창문을 가리고 하루 종일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가지 않은 날도 많았다. 매일매일 나의 무가치함과 세상에게 버림받은 듯한 외로움과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일은 꼭 죽자. 내일은 꼭...
그때쯤 위험을 감지한 정신과 의사가 '아빌리파이'를 처방해줬다. 아빌리파이의 효과는 놀라웠다. 이틀 정도가 지나자 나는 집안일을 할 수 있었고, 취직 원서를 낼 수 있었으며, 삶의 의욕으로 가득찼다. 실제로 약을 복용하는 동안 가장 열심히 구직활동을 해서 재취직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한여름밤의 꿈에 불과했다. 아빌리파이를 끊자마자 기분이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병원에 달려가 의사 멱살을 잡고 아빌리파이를 내놓으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번 맛본 '평범하게 평안하고 좋은 기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은 강렬했고 그래서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비참하고 괴로웠다. (하지만 아직은 아빌리파이 없이 버티고 있다. 아빌리파이의 부작용 중 내가 겪은 것은 체중증가이다.)
다시 돌아가면, 이 모든 상황은... 비잔에서 시작되었다. 비잔을 먹는 동안 아주 천천히, 하지만 또렷하게, 내 우울증은 깊고 단단하게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그럼 비잔을 끊으면 되지 않느냐고? 비잔을 끊으면 자궁내막증의 재발확률은 50퍼센트까지 올라간다. 그러면 같은 수술을 세 번이나 받게 될 테고, 몸은 그만큼 망가진다.
몸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둘다 아프면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경중을 따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늘도 두 가지 약을 동시에 삼킨다. 그리고 영양제도 삼킨다. (비잔을 먹으면 골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비타민 복용이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몸과 마음은 자꾸만 출혈을 일으킨다. 그럴 때면 끝없이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며 커튼을 닫고 침대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간다. 부디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기를 바라면서. 좀 더 좋은 내가 되길 바라면서. 이것의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길 바라면서. 인간이 진화를 한다면, 제발 호르몬의 노예로 태어나지 않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