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손원평의 『아몬드』
극장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2004>를 보고 막 나온 참이었다. 그 친구는 눈이 녹아 질척해진 길 위에 서서 내가 건넨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그 상황에서 난 웃음이 났다. 진석이 정신을 잃은 형, 진태를 움켜잡고 “엄마한테 가야 될 거 아니야”라고 했을 때부터 얼굴을 감싼 채 펑펑 울던 그 친구 옆에서 이미 나는 고개를 돌려 실실 웃고 있었다. 그 친구는 오늘 이만 헤어지자고 했다. 거기서 ‘오늘’은 빈말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아몬드도 작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세상’이 평범하다고 여기는 작은 크기로 깎여,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다. 모두 다 참아야 했다. 항상 점잖게 있어야 했고, 어떤 짐이든 짊어져야 했다. ‘세상’이 “울지 마!”라고 하면, “네”라고 대답해야 했다. 난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았고, 코미디 영화를 봐도 웃지 않았다.
나 역시도 소설 속 윤재와 같이, 남들처럼 느끼지 못해 곤란했던 일이 많았다. 특히 슬프고 화나는 일을 마주했을 때보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 주어졌을 때 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무리 기뻐도 얼굴에 잘 표가 나지 않았고, 진심으로 감사해도 벌써 스스로 부족하게 느꼈다. 그래서 신세를 지거나 축하받는 것을 꺼렸다. 어쩌다 텔레비전에 안타까운 장면이 나오면 아예 채널을 돌려버렸다. 길을 가다 불편한 모습이 있어도 멀리서부터 외면했다. 덕분에 내 인생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 일이 적었다.
비로소 눈물을 흘리는 윤재를 보면서, 나의 아몬드가 작은 것이 아니라 내내 두툼하게 덮여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와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던 것이다. 어떤 감정이든 마음속에 이는 것이 불편했고, 그만 피해버렸다. 슬피 우는 그 친구 앞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그만 웃어버렸던 것처럼, 또 엉뚱한 표정을 짓게 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아몬드가 작은 것은 괴물이 아니다. 감정을 그저 참는 것도 평범한 것이 아니다.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없는 것, 가진 아몬드를 마냥 덮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미숙한 일이다. 결국 난 괴물이 되었다. 난 이제 내 아몬드를 깊숙이서 파내 오랫동안 묻어있던 흙을 털어낼 것이다.
아몬드 / 손원평 / 창비 / 2017
괴물인 내가 또 다른 괴물을 만났다!
영화와도 같은 강렬한 사건과 매혹적인 문체로 시선을 사로잡는 한국형 영 어덜트 소설 『아몬드』.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해진 공감 불능인 이 시대에 큰 울림을 주는 이 작품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의 특별한 성장을 그리고 있다.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열여섯 살 소년 선윤재와 어두운 상처를 간직한 곤이, 그와 반대로 맑은 감성을 지닌 도라와 윤재를 돕고 싶어 하는 심 박사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전한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년 선윤재.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 분노도 공포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는 타고난 침착성, 엄마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에 별 탈 없이 지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이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는다. 그렇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윤재 앞에 ‘곤이’가 나타난다. 놀이동산에서 엄마의 손을 잠깐 놓은 사이 사라진 후 13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곤이는 분노로 가득 찬 아이다. 곤이는 윤재를 괴롭히고 윤재에게 화를 쏟아 내지만, 감정의 동요가 없는 윤재 앞에서 오히려 쩔쩔매고 만다. 그 후 두 소년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고, 윤재는 조금씩 내면의 변화를 겪는데…….
출처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