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 Jan 07. 2024

영상 8도

반복


  한 배우가 죽었다. 늦은 밤, 일이 끝나고 카프카에서 술을 조금 마셨고 그 배우는 여전히 노트북 화면 속에서 말하고 있다. 배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로 "이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고"라고 말했다. 죽었지만 보이고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 나는 그 배우를 영상으로 봤으니, 그는 여전히 내가 알던 표정과 입 모양 그대로 화면에 살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반면에 바로 내 눈앞에 있기에 어제 본 사람보다 더 현실감이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느껴지는 현실감 때문에 울컥 치민 분노와 슬픔이 섞였다. 뭐지?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 따위가 아니다. 이건 그냥 즉각적인 반응, 배가 고픈 것과 비슷하다. 또는 배가 아파 화장실에 빨리 가야 하는 것과 같은. 철렁, 하고 중요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같은.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슬픔처럼 점점 묽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배우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이 배우가 나온 영화를 좋아했고 배역을 좋아했다. 영화에 나온 인물간의.관계를 좋아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배우가 연기한 사람과 그 사람과의 관계들을,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을.


  죄보다는 죄를 단죄하는 사람들의 방식에 무서움을 느낀다. 함부로 단죄하는 법을 모두 배우고 말았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아마도 그 배우를 나처럼 화면을 통해 봤기 때문에 실제하지만 살아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연애인이라는 명사로만 보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 바로 옆 친구나 부모 같은 존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비난은 대부분 너무도 논리적이다.  모두 자신이 맞다고 말한다. 논리적인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말과 글이란 칼로 타인을 찌른다. 하지만 인간은 인과성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논리적인 인과는 살면서 만들어내는 여러 관계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작은.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어머니의 아들인 것도 논리적인 인과성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이유 없이 깊이 연결된 무엇에 의해 정의된다. 그 뒤에 우리는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라고 이유를 찾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을 단죄할 때는 논리적이고 인과적인 방식으로 한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창처럼.

  이 사냥 방식이 곧 나에게도 닥칠 것만 같다. 언젠가는 내가 사냥감이 되고, 내 친구와 가족이 사냥감이 될 것만 같다. 어떤 죽음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억압되어 움푹하게 고인 곳을 느닷없이 보여준다. 내 삶을 관통하고 투사해서 부끄러움을 알게 하고, 변화의 출발점을 만들어낸다. 항상 그것이 죽음 같은 극단적인 것에만 반응한다는 사실에 비통한 마음뿐이다.  

  

  새해니 희망찬 말을 하고 싶지만, 새해에 '새'라는 단어가 되레 낯설다. 그 어느 것도 새것이 없다. 모든 것이 새것이라든 듯이 달려드는 1월 1일이 무섭다. 하루가 또 지나고, 1월 2일, 3일, 달려드는 날짜가 새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해 동안 반복되었던 헌것이다. 모든 것이 깊게 파묻혀 있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반복일 뿐이다. 아주 조금 다른 반복. 그 차이로 우리는 새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범위 안에서, 그리고 자기 경험 안에서, 더 나아가 자기 정체성 안에서. 좋게 말해 안에서이지 갇혀 있는 범위 내에서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다.

  아무리 큰 변화를 추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냥 사람이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규율과 사회 통념 속에 갇혀 있다. 자연법칙 안에서 가장 하찮은 규칙일 뿐이다. 수시로 변하고, 수시로 어기는. 법칙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의 법칙들.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그 하찮은 것이 우리를 정의한다. 그 하찮은 것이 개인 인생의 많은 것을 규정한다. 그 하찮은 것을 우리는 지키지도 못한다. 그래서 더욱 지켜야 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쇼펜하우어의 명언처럼, 인생은 고통과 권태의 연속이다.

   권태롭지 않기 위해 변화를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이뤄졌을 때, 더 새로움을 찾기 힘들 때 권태에 빠지고,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찾아오는 결핍에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권태에 빠지기 전 새로움을 통해 짧을 행복을 맞본다. 그 찰나가 지나면 다시 권태에 빠진다. 하지만 권태에 계속 머물 수도 없다. 권태로울수록, 더 강한 강도의 새로움을 찾는다. 다시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과 권태의 연속이고 끝은 없다. 이 반복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고 싶은 것이고, 그 의지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다. 고통과 권태의 추가 반복해서 움직이는 사이에 행복과 슬픔과 기쁨, 그리고 타인과의 삶이 가득합니다. 고통과 권태를 반복한다는 뜻은, 어쩌면 제대로 반복한다는 뜻은, 그사이에 가득한 감정을 오롯이 다 느낀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롯이 느끼는 과정이 내면의 공허를 채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찰나가 아닌 이야기 방식으로. 인스타그램에 행복한 사진을 올리는 방식이 아닌. 나와 타인을 분절하여 판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울 것 없는 새해다. 하지만 새것이 없는 이 반복 속에서 아주 작은 새로움을 찾고, 잊었던 것을 다시 꺼내 올린다. 새로운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에서 만들어진다. 작년 한 해 나는 무엇을 잊어버린 것일까? 헌것에서 새로움이 나오니 헌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새것도 곧바로 헌것이 되고, 그 헌것이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이 반복이 구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공간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