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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gaya Nov 10. 2024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를 처음 접해봤습니다. 문학 전공한 아시아계 미국 여성 셋이 뉴욕에서 출판업계 커리어를 시작한다는 책 소개를 듣고 딱 내 취향이라는 느낌에 책을 주문했습니다. 일리노이 주 어딘가의 중고서점에서 두툼한 '만화책'이 도착했습니다. 만화보다는 서사(이야기)가 깊고 복잡하다는 게 그래픽 노블이라고 합니다. 첫 그래픽 노블을 읽고 나니 만화와 가장 큰 차이점은 페이지가 매우 천천히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인물 간 대화나 텍스트만 읽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듯 깨알 같은 배경과 소품 정보도 놓치고 싶지 않아 웬만한 책 읽기보다 훨씬 더 공이 듭니다. 간판, 메뉴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렇게 첫 그래픽 노블을 아껴가며 다 읽은 후 생긴 지배적 감정은 아련함과 청춘의 애상입니다. 뉴욕 비좁은 아파트에 살며 직장에서 분투하는 여자들을 통해 누구나 겪을 법한 고민, 혼란, 막막함, 불확실성에 공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풋풋함과 '갈망'이 왠지 슬펐니다.


청춘의 애상

좀 낡은 표현 같지만, 나는 '청춘의 애상'이 불러오는 아릿한 감상을 좋아합니다.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베토벤과 함께 등장한 표현이었는지, 어느 라디오 방송 슈베르트 설명에서 들었던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가 비싼 뉴욕 공동 주거공간에 모여 살며 출판업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실비아, 니나, 시린의 이야기는 나를 20대 시절로 데려갑니다. 일 배우느라 허덕이며 늦은 밤 회사 근처 자취방으로 돌아오던 시절 말입니다. 울적할 때도, 그저 피곤할 때도, 이게 맞나 싶은 회의감에 씁쓸할 때도 있었죠. 여기에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주인공에게는 미세한 인종 차별이 추가됩니다. 세 주인공 모두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백인 상사, 동료와 갈등하기도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백인들은 명백하게 인종 차별하는 부류가 절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필리핀계 미국인 시린에게 중국어 할 줄 알 것 같아서 뽑았다는 말을 건네는 '황당'한 태도가 존재할 뿐입니다.


롤모델

이 책 핵심 서스펜스는 아래층에 사는 베트남 출신 할머니 베로니카의 인생 수수께끼입니다. 실비아는 우연히 그녀가 오래전 부커상을 받은 소설가이며, 지금도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베로니카는 첫 작품으로 큰 상을 받고 70년대 뉴욕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잠시 빛을 보지만, 본인이 쓰고 싶은 책보다는 인종 정체성에 맞는 책을 원하는 시장에서 서서히 빛을 잃고 사라집니다. 누구나 고민하는 '쓰고 싶은 책 vs 팔리는 책' 갈등과 어쩌면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단, 베로니카의 경우는 잘 팔릴 책을 원하는 시장 논리에 더해 인간 보편 문학 말고 '소수 (인종) 문학'을 원하는 주류 사회 압박이 더해진 셈입니다.


베로니카는 주체적 인생을 살아내며, 3명의 사회초년생 이웃을 여유와 관대함으로 보듬고 그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그녀는 부커상 영예를 뒤로하고 자신이 원하는 '안 팔릴' 책들을 끊임없이 써냈고, 유명인 대필 작가가 돼 번 돈으로 뉴욕에서 '자기만의 방'을 확보합니다. 깔끔하고 포근한 공간에서 90살 넘은 그녀는 독립된 일상을 즐기며 후배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뉴욕 공간성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문학과 영화 소재로 등장하는 공간은 뉴욕 같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몰리고, 낙심하고, 버티고, 못 버티며 거쳐간 뉴욕은 이 책에서 정겹고, 진저리 쳐지고, 쌀쌀맞게 그려집니다. 외부인 눈에 뉴욕은 낭만과 성공을 상징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월세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직장인 혹은 취업준비생에게는 매몰찬 도시이기도 합니다. 맨해튼 사무실부터, 한국 치맥집, 럭셔리 찜질방, 지하철 출퇴근 길, 찐빵 가게, 시립도서관 등 이 책에 나오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에 생기와 매력을 더하는 요소입니다. 우리는 이미 대중문화와 수많은 책 속에서 뉴욕의 이 공간들을 체험해 봤으니까요.


굳이 그래픽 노블이라는 입에 붙지 않는 표현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나는 그냥 만화책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안타까움, 아련함, 슬픔이 있, 궁금증을 자아내는 핵심 서스펜스가 있고, 갈등이 해소되며 후련함을 선사하는 좋은 만화책말입니다. 짐 느는 걸 질색해서 읽고 싶은 책은 주로 전자책으로 사거나 빌리지만, 이 책만큼은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가며 즐기싶었습니다. 예감은 적중했고 중고책 딱지 붙은 이 만화책은 여러 모로 쓸모가 많을 듯합니다.



아래층에 부커상 수상자가 산다

A Career in Books

글, 그림: 케이트 가비노(Kate Gavino)

Penguin Random Hous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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