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쓰던 시절 책상에 붙여둔 문구가 "고만 좀 읽고 써라(stop reading, start writing)"였습니다. 수업 과제부터 학위 논문까지, 크고 작은 글을 써야 할 때 선행 연구나 참고 문헌을 계속 읽고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글을 써야 할 것 같았죠. 뭔가 중요한 걸 놓치지 않을지, 이미 다른 사람이 똑같은 내용을 썼는데 내가 인용 없이 베낀 꼴이 될지 등등, 읽기가 자연스러운 준비 과정일 때도 있습니다. 단, 굳이 포스트잇에 큼직하게 "고만 좀 읽고 써라"라고 붙여놓은 이유는, 읽기가 쓰기를 자주 방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피
내게 '독서'는 최대한 '쓰기'를 미루려는 회피일 때가 많습니다. 뭐라도 읽고 있으니 노는 건 아니라고 정당화하면서, 내 실력보다 훨씬 뛰어나고 밀도 높은 저자들 책으로 쏙 도피하는 거죠. 실제로 좋은 글을 읽는 건 기쁨 호르몬이 나오는 달콤한 일이니까요.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그제야 쓰기 시작하며 후회합니다. 좀 일찍 시작할걸. 무거운 마음으로 결국 쓰기 시작하다 보면 이것저것 읽으며 표류할 때보다는 생각도 명료하게 정리되고 벼려집니다. 수동적으로 뇌에 입력되는 '읽기'보다, 내 손과 뇌에서 직접 조합한 모음 자음들이 화면에 문장을 구성하면 마치 운동을 한 듯 성취감이 듭니다. "그래, 써지긴 써지잖아!"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만든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머리로 생각할 땐 두리뭉실하던 게 쓰는 과정을 통해 다듬어지니까요.
달리기 과정을 통틀어 가장 힘든 단계는 운동화 신고 집 나서기입니다. 젤 어려운 신발 신기를 마치고 막상 바람을 가르며 뛰다 보면 리듬을 타고 어느새 그리 어렵지 않게 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운동과 글쓰기가 똑같지는 않습니다. 뛰고 나면 항상 상쾌하지만, 쓰고 나면 어휴, 다 버리고 싶단 생각이 종종 드니까요.
물론 누구에게나 '읽기가 쓰기를 방해'하진 않죠. 굳이 쓰려는 사람이 아니면 하고픈 대로 읽기에 푹 빠져 지내도 좋습니다. 단, 나처럼 쓰고 싶은 게 있어 벼르거나, 주변에 쓰리라고 말해뒀거나, 쓰기 모임에 내야 하거나, 공모전 마감이 다가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내 경우 가장 큰 방해 요소는 병치레도, 생업도, 게으름도 아닙니다. 지금도 나는 지난주 삐끗한 허리 때문에,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디서든 쓸 수는 있습니다. 또 생업이 있다고 해서 하루 15분 글 쓸 시간을 못 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없이 게을러지는 시기가 와도 내 글쓰기를 방해하는 건 유튜브도 카톡도 아닙니다. 글쓰기 먼 친척뻘 되는 '독서'야 말로 고약한 지능범입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간절함을 이용해 '유사 쓰기 행위'로 막판까지 나를 잡아두는 게 바로 '남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과한 독서?
그럼 과한, 지나친 독서란 무엇일까요? 술, 담배, 기타 중독에는 별 관심 없는 나에게 가끔 문자 중독 시기가 밀물처럼 찾아옵니다. 해야 할(특히 쓰기) 일을 미루고 달콤한 수동 모드로 전환해 그저 그런 글을 읽어대는 시기입니다.
"역행자"라는 자기 계발서가 베스트셀러라 몇 장 들여다보다 그만 다 읽고 말았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류 자기 계발서에서 한 치 앞도 더 못 나간 이런 책을 왜 읽어놓고선 나는 혀를 쯧쯧 차는 걸까요? 또 오래전 "시크릿"이라는 황당한 자기 계발서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시크릿 유행은 공격적 책 광고로 책을 판 경우죠. 책 내용을 판 게 아니라 그저 돈을 위해 종이를 판 사례입니다. 이런 껍데기 자기 계발서는 나쁜 독서입니다. 영양가 없이 정제 탄수화물, 정제 가당류만 섭취하고 즉시 혈당을 떨구는 인스턴트 독서죠.
엉터리 번역서를 읽어도 독이 됩니다. 좋은 문장을 읽어도 모자랄 판에 나쁜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을 내용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읽을 때, 이런 문장에 익숙해지면 어쩌나 싶습니다.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하고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죠. 일본어 투라서 지양해야 하는 문장이 골고루 다 들어간, 마치 "이렇게 쓰면 안 된다" 교본서 같았습니다. 사역문, 으로부터, 의, 이중 부정인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게서로부터 등 올바른 한글 쓰기를 방해하는 나쁜 예로 가득했습니다. 하루키 책을 좋아하지만, 원서를 읽을 수 없으니 이런 도박도 하게 됩니다.
여러 권 동시에 읽기
책 한 권을 다 끝낸 후 다음 책을 시작하지 않고, 나는 동시에 여러 권을 읽습니다. 이 자체가 나쁜 습관은 아니지만 단점이 있습니다. 입맛을 자극하는 책이 몸에 좋은 책을 뒤로 밀어버리니까요.
몇 개월째 순위에서 밀려나는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 "발자크 평전"입니다. 독어 원서라서 후순위로 밀리기도 하지만, 재미와 영양 다 잡은 저탄고단 식품인데 진도가 영 안 나갑니다. 이 책은 휴양지에 가져가야만 끝낼 수 있습니다. 엉뚱하고 존경스럽다가 그 허영심에 피식 웃게 되는 발자크 이야기를 자꾸 뒤로 밀어버리는 책은 일단 한글책, 그리고 단편집입니다. 김애란, 김연수 류의 뇌를 녹녹하게 마사지해 주는 고운 글말입니다.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처럼 여운이 오래가는 그녀 최고 걸작도 나에게, 그리고 이 타이밍엔 자극적 입맛 책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나만의 괴상한 분류가 여기 작동합니다. 노벨상 수상 작가 책이 왜 섭취를 절제해야 할 책이냐고요? 순전히 내 식대로 분류하자면 나는 내 행동과 가치관에 지속적 영향을 주는 그런 책을 최고로 치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책 말입니다. 발자크 평전도 아직 반밖에 못 읽었지만, 처음부터 강력한 완벽 식품 냄새가 났죠. 치명적 단점을 지닌 한 인간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다작을 해내서 문학사 기류를 바꾼 그 여정과 뚝심, 실천력에 압도됩니다. 나는 발자크를 사랑하고 본받을 준비가 됐습니다. 벌써 한 5개월 전부터죠. 단, 좀 더 자극적이고 덜 씹고 삼켜도 되는 매력적인 음식이 널려있기에 수저가 덜 갑니다.
한강 작가 노벨상 수상 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작별"을 읽었습니다. "채식주의자"는 맨부커상 수상 후 읽었더랬죠. (예, 나는 일단 '뜨면' 읽는 유행 민감자입니다). 군더더기 없고 신선한 한글 표현을 읽는 즐거움 자체가 기쁨을 선사하니 내 몸에 분명 좋습니다. 특히 "희랍어 시간"에 등장한 남주, 여주의 절망과 시련, 아득함은 마치 내가 겪은 듯, 상처에 흉터까지 남긴 듯 생생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강 문체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버렸지만, 내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최고작은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나는 독서를 참 괴팍하게 분류한다 싶습니다. 마치 서열을 두는 것 같아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고전을 올려치다니 은근 보수적인 면도 있나 봅니다.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인 '쓰기'를 훼방 놓는 잘난 사람과 책에 대한 부러움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게 분명합니다! 나도 좋은 글을 생산해서 나누고 공감받고 싶은데, 잘 차려진 식단에 계속 한눈을 파니 말입니다.
해결책은 어릴 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일기를 써서 내야 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로 말입니다. 되든 안 되든, 억지든 뭐든, 일단 뭔가를 써서 제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꾸역꾸역 분량을 늘려야겠습니다. 그 속에서 진주는 아니더라도 예쁜 조약돌은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죠.
(커버 이미지: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