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잘 하는 일일까?
5월 말까지 나오기로 했지만 남은 병가와 연차를 쓰고 중순까지만 나오기로 했다. 이제 남은 작업 2가지만 마치면 이 곳에서의 일은 끝이다. 그럼 집에서 빈둥거리게 되겠지. 빈둥거리고 싶지만 빈둥거리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시간을 채워나가겠지. 세세한 일들은 내 손을 거치지 않고 실행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자리에 있고, 매월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고, 그 누구도 빡쎄게 일하지 않아도 되고, 휴가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정년까지 보장된 직장을 이렇게 박차고 나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이직도 아니고,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그만두는게 옳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축하해주었다. 드디어! 탈출한다고. 하지만 그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다음 인생을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회사에서 더 이상 성장이 없는 것이 싫어서 그만두는 것인데, 나가면 나는 성장하게 될까? 회사가 없으니 나 스스로 동력을 만들고 움직이지 않으면 성장은 커녕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게 될텐데, 나에게 그럴 힘이 남아있나? 대모님은 내게 이제 좀 스스로를 쉬게 내버려두라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쉰 건 쉰게 아닌걸까? 휴직을 거절하고 굳이 그만두는 이유도 마음 놓고 진짜 쉬기 위한 결정이긴 한데, 이게 맞는걸까?
아는 분 와이프가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으로 투병하시다가 8년만에 첫 알바를 나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8년. 지금 집으로 돌어가면 나는 얼마만에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까? 사회로 복귀할 수 있겠지? 이 불안감을 이기고 나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생을 잘 살아나갈 수 있겠지? 남편에게 기대서 쉬고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부담주기는 싫기도 한데,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이렇게 무작정 쉬는 것이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될까? 그 동안 내가 회사를 다니며 버틴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회사라는 (잘 지키지는 못하는, 그러면 죄책감이 드는) 출퇴근 루틴이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남편도, 언니도 뒤돌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회사 없이 사는 걸 꿈꿨지만 막상 회사가 없다고 생각하니 황망하다. 남편은 내가 '남편의 아내로서, 사랑이의 엄마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남편을 만나고 결혼한 이후의 내 회사 생활은 그 전처럼 치열하지 않았고, 그저 죽지못해서 다니는 것과 같았는데, 아직도 나에게 사회적 열망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숨만쉬고 살고 싶다.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 대모님은 나에게 뭘 하려고 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냥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그러라고 자꾸 브레이크를 거는 거라고. 그런 순간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두라고 했다. 채찍질도 당근도 생각하지 말라고.
투약을 언제쯤 멈출 수 있을지, 나는 언제쯤 좋아질지, 남편이 지치지 않게 내가 잘 생활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언니는 남편이 힘들고 지치지 않게 잘 하라고 늘 말한다. 아픈 사람과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엄마와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엄마가 늘 어딘가 아팠던 거였다. 그런데 내가 그러고 있다. 그게 참 싫다.
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았다. 진짜 그럴 것 같다. 그래서 그만 둔다. 그런데 겁이 난다. 친한 언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기를 기대한다. 구체적으로 꿈꾸는 것이 없으니 기도지향도 두루뭉수리하다. 나에 관한 기도지향만 그렇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지향은 다 구체적인데, 내 앞날을 위한 기도지향은 그렇다. 그럼에도 어쨌든 기도는 한다. 나도 언젠가는 구체적인 꿈을 기도하고 싶다.
퇴사 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될 줄 몰랐다. 퇴사까지 시간이 너무 긴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