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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J May 16. 2024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요

[우울증 환자 생존기] 퇴사의 자세

회사에 오늘까지만 나가려고 했는데, 5월의 마지막 이틀을 더 나가고 마무리하기로 했다. 오늘 모든 업무를 완료하고 부서원들과 점심 먹고 공원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제일 친했던 직원과 차도 한 잔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회사생활의 마지막을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분이 매우 좋다. 괴롭고 힘들기만 한 것 같아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인데,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끝에 다다르니 좋은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가는 것 같다. 함께 일했던 예술가와 기획자가 유일하게 자기들 마음을 알아주는 재단 기획자로 나를 뽑아주는 것도 고맙고, 부서 직원들이 웃으며 아쉬워하며 응원해주는 것도 고맙고, 여기를 그만두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정상인이라는 뜻이라며 제발 나가지 말라는 동료도 고맙다. 여기서 접시를 일 년에 17개씩 돌리며 미친듯이 사업을 운영하던 시절도 좋았고, 해보고 싶은 일들을 다 해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나의 청년기를 불태운 곳이어서 좋았고, 이 곳을 다니면서 남편을 만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아픔도 많고 괴로움도 많고 세상살며 처음 겪어보는 일도 많아서 상처도 많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다 좋았던 것처럼 헤어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런 좋은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서 기쁘다.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잘 이별할 수 있는. 


첫 회사는 벤처버블이 꺼지던 시절 아웃소싱으로 퇴사했고, 두번째는 사람과 연봉체계 부당대우에 화가 나서 퇴사했고, 세번째는 사람들에 질리고 일적으로도 더 이상 성장기회가 없다는 걸 인정하고 희망고문 그만 하려고, 회사에서 얻은 병도 치료하려고 퇴사한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그만두는 시점까지 계속 화가 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만두는 시점에 마음 좋게 지낼 수 있어서 기쁘다.


좋은 마음으로 퇴사해서 좋은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답게 이별할 줄 몰랐다. 그 괴로운 곳에서 이렇게 기쁘고 예쁜 마음으로 퇴사할 줄 몰랐다. 나도 내 마음 가는 곳을 알 길이 없으니 살아봐야 아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업무가 2가지 정도 남고부터는 불안감과 압박감이 없어지면서 몸이 편안해졌다. 마음은 물론 계속해서 '이게 맞나?' 물어보고, 또 물어보면서 끝없이 '맞다'는 대답을 확인했다. 미련하게 12년을 다니고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버티고 버티면서 스스로의 한계치까지 다 가보고 내린 결정이라 후회는 없다. 그리고 지금 부서장과 부서원들이 다 좋아서 즐겁게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좋다. 


회사를 그만두고 당장 어느 회사에 들어갈지 정해진 바는 없지만, 일단은 2달 동안 할 일이 생겼다. 청년 문화기획자 양성 워크숍에 합류하기로 했다. 할 일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일이 끝날 때 쯤에는 또 할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 업계를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여기서 내가 맺어온 인연 중에 소중한 사람들도 많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도  많으니 고마운 인연들을 조심조심 잘 이어가야겠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수도 있고, 밖에 나가면 하고 싶은 새로운 일들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나를 던져 온 몸으로 인생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어떤 인생이든 나의 삶을 살아가야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이와 함께. 아직 회사를 완전히 그만둔 것이 아님에도 벌써 몸과 마음이 좋아졌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내가 살기위한 선택이었음이 확실하다. 손목과 목을 베던 칼날도 사라졌고, 가슴두근거림도 사라졌다. 그저 평범한 하루하루가 있을 뿐이다. 그게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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