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 생존기] 혼란은 당연한 결과
상담센터에서 TCI 기질 및 성격검사를 했다. 검사비용도 높지 않고, 요즘 많이 하는 간단한 검사인데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격을 알아볼 수 있는 검사라고 했다. 기질은 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인내력을 알아보고, 성격은 자율성, 연대감, 자기초월을 알아볼 수 있다. 각 항목은 4~5개의 세부항목을 알 수 있다. 남편도 같이 진행했는데 남편은 거의 모든 결과가 평균범주에 고르게 분포하여 결과지 좌표가 거의 일렬로 찍혔는데, 나는 좌표가 갈지자를 그리며 중구난방이다. 전체 결과 그래프를 보면 남편 그래프가 오른쪽을 향하면 나는 왼쪽으로, 남편이 왼쪽으로 향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걸 눈으로 보니까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가장 낮은 점수를 보인 건 인내력 부분의 '근면'이다. 2점이다. 좌표가 아주 낮음 경계선에 붙었다. 남편이 "어쩐지 제가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닌데, 이 사람이랑 있으면 제가 너무 부지런하더라구요. ㅎㅎㅎ" 했다. 끈기도 낮은 편인데 성취에 대한 야망은 높고 심지어 완벽주의가 심하다. 그러니 매번 괴로울 수 밖에 없는 거다. 게다가 쉽게 지침의 정도가 거의 최고조로 높게 나타나 체력이 거의 없음 수준이니,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괴로울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나의 근면과 끈기를 높여서 일을 더 완벽하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성취에 대한 야망과 완벽주의를 내려놓아 편안한 상태로 가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전자의 노력을 기울이느라 에너지를 많이 쓰는데,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면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이다. 야망과 완벽주의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성공하지 않는 삶이 아니니까 그렇게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신선했다.
타인수용도 낮음의 경계선에 바짝 붙어있다. 싫은 사람을 못 받아들이는 거다. 공감대도 낮고 관대함도 낮다. 이타성과 공평함에 대한 점수는 평균이상이지만 전체적인 연대감이 엄청 낮다. 나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와 맞는 사람에 대한 공감 한정판이었던 거다. 싫은 사람은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대하기는 더욱 어려운 지경인 거다. 살면서 싫은 사람과 부딪힐 일이 없을 수 없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니 힘들 수 밖에. 최대한 싫은 사람을 피하는 방법도 있고, 싫은 사람도 그러려니 하고 좀 넘어가주는 훈련을 하는 방법도 있는데 나는 최대한 싫은 사람을 안 만나려고 하는 쪽을 선택하며 산 것 같다. 그래서 회사 다니는 것이 힘들어 결국 돌고 돌아 다시 프리랜서를 하게 된 듯 하다.
또 낮은 부분 중에 하나가 목적의식인데,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에 대한 점수가 매우 낮은 편이다. 자기수용이나 자기일치도 낮고.
최근에 재미있게 본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수빈이 자기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하빈아. 그건 평생 모르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상담을 하면서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멘탈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내 생각에도 상담은 나에게 좋은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이토록 중구난방인 나 자신도 받아들이고, 아프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인 듯 하다.
구체적으로 각 요소들을 어떻게 조정하는 것이 좋을지 남편과 이야기 나눠보라고 했는데 아직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혼자서는 답이 안 나온다.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