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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는 감사한다

by 고수리

“왜 그리 빨리 걸어요?”

함께 걷던 지인이 물었다. 제 걸음이 빠른가요? 되묻자, “항상 종종걸음으로 걷잖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루를 돌아보았다. 수십 개의 알람에 치이며 분초를 쪼개 돌봄과 작업을 오가는 날들. 종종걸음을 걸으면서도 내심 초조하게 바랐다. 어떤 마찰이나 갈등 없이 순조롭고 효율적으로 모든 일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더 많은 성취를 이루고자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소진된 하루의 끝에는 소중히 남을 의미랄 게 없었다.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에 휩쓸려 끌려다닌 기분이랄까. 더구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매일의 경험과 사유가 납작해지는 걸 느꼈다. 몸에 밴 종종걸음을, 내 삶의 속도를 늦춰야만 했다. 평범한 하루라도 여행자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낯설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 보기. 소소한 것들을 발견하고 감탄하기. 만끽하기. 감사하기. 의미를 찾는 순례자처럼.


작업실로 향하는 오후, 한영애의 ‘가을 시선’을 들으며 은행나무 길을 걸었다. 글쓰기 전 마음가짐을 예열하는 산책처럼 풍경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휘돌며 떨어졌다. 오래된 가게와 철물점, 기사식당이 자리 잡은 길가로 택시들이 줄지어 쉬어가고, 보도블록에 의자를 내어두고 한담을 나누는 사람들, 발치에 은행잎을 툭툭 차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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