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른다는 사실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익숙한 것들 위에 조용히 쌓인다.

by 헌이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은 대개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물건 하나, 문득 마주친 기억 하나에서 시작된다. 나에게는 어릴 적 사용하던 낡은 연필깎이가 그렇다. 상처는 많고, 곳곳의 색은 바랬으며, 손잡이는 매끄럽지 않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기능도, 디자인도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것을 가지고 있다. 요즘 나오는 전동 연필깎이에 밀려 이제는 쓰지는 않지만, 버릴 수는 없는 상태로.


그 연필깎이는 나의 시간을 설명해 주는 물건이다. 새것이었을 때의 모습은 이미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지만,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 번 돌릴 때마다 들리던 작은 소음, 위의 뚜껑이 깨져 날아갔던 기억과 다시 수리했던 기억. 그 반복 속에서 연필깎이는 점점 낡아졌고, 나는 조금씩 자라났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과정 자체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은 늘 무언가를 가져간다. 하지만 동시에 남긴다. 지나간 시간에서 얻은 것들은 성과나 결과만은 아니다. 기다리는 법, 반복을 견디는 법,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 써 내려가는 태도 같은 것들이다. 연필이 완벽하게 깎이지 않아도 글은 쓸 수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가 있어도 내일은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우리를 훈련시킨다.


어릴 적에는 시간이 많다고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지닌 의미 자체를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닳고, 모든 선택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 인식이 생긴 이후부터 시간은 배경이 아니라 자원이 되었다.


낡은 연필깎이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새것으로 교체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것들은 효율이 떨어져도, 최신이 아니어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다.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되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아마도 ‘삶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빨리 가야 할 때와 천천히 가도 되는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되, 힘을 빼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지금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버려야 하는 것과 챙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바꿔 준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로. 얼마나 빨리 갈 것인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갈 것인가로.

낡은 연필깎이는 그 질문의 방향을 상기시켜 준다.

이미 충분히 지나온 시간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분명 무언가를 얻었다는 사실을.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다. 그 흐름을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위에 남은 흔적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선택할 수 있다. 나에게 그 선택은, 버리지 않고 남겨두는 쪽에 가깝다. 낡았지만 의미 있는 것들, 더 이상 쓰이지 않아도 삶의 방향을 조용히 지탱해 주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연필깎이를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통과해 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거는, 앞으로의 시간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조용히 규정하고 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