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없는 카페, 그 1년의 실험
1년 전. 대한민국 커피업계를 뒤흔드는 브랜드가 등장했다. ‘파란병의 혁명'으로 불리는 블루보틀이다. '한국에 상륙한다'는 티저 마케팅만 2년 여.
커피 마니아들의 긴 기다림 끝에 성수동에 터를 잡았다. 미국에서 2002년 탄생한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은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진출국으로 한국을 택했다.
문 연 첫날부터 1개월 가량은 3~4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명소가 됐다. 이후 1년 간 삼청동, 역삼동, 압구정동, 한남동 등 5개 지점으로 늘었다.
블루보틀은 더 이상 줄 서서 마시는 커피는 아니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을 써내려가고 있다.
블루보틀에는 다른 카페에는 있는 세 가지가 없다. 아르바이트, 진동벨, 원격 주문 시스템이다. 20대 구직자들의 이직률이 가장 높은 커피업계에서 블루보틀은 지금까지 100% 정규직으로 120여 명을 채용했다.
밥 먹듯 이직하는 커피업계서 이직률 0%
화려한 데뷔전을 뒤로 하고, 블루보틀은 새로운 직업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블루보틀에서 처음 일할 때 배우는 건 '커피'가 아니라 '배려와 소통'이다 지난 1년 간 블루보틀의 이직률은 0%였다.
왜 그럴까.
블루보틀은 '제 3의 물결'이라 불리는 스페셜티 커피를 다루는 브랜드다. 국제 스페셜티커피협회(SCA) 기준으로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 받은 최고급 원두를 사용한다. 하지만 진정한 스페셜티 커피는 엄격히 관리되고 제대로 로스팅, 추출돼야 한다. 커피 나무 상태부터 농장의 농부, 생두에 등급을 매기는 커퍼, 생두의 맛과 향을 끌어올리는 로스터,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까지 모든 과정이 중요하다.
블루보틀이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서 강력한 브랜드가 되는데는 로스팅 등 생산 프로세스의 철저한 컨트롤 외에도 서비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라이언 미한 CEO는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서 ‘환대 문화(hospitality)’를 강조해왔다. 손님을 대하는 '특별하고 섬세한 과정'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블루보틀의 코어라고도 했다.
블루보틀이 일하는 법
블루보틀 본사에는 '커피문화 총괄책임자'라는 직책이 있다. 미국 출신 세계 커피 챔피언이자 유명 바리스타인 마이클 필립스가 이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에도 여러 번 왔었다.) 한국의 각 점포에서는 '카페 리더'가 이 역할을 한다.바리스타 교육부터 카페 운영 책임까지 맡는다.
김미소 성수 1호점 카페 리더는 “블루보틀 카페 리더는 매장 내 모든 직원과 1대1 대화 시간을 갖고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커피를 만드는 기술이 아닌 '소통 능력'이 평가의 가장 큰 가중치를 갖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블루보틀에는 팀원 간 피드백의 원칙이 있는데 '6개의 칭찬을 한 후, 1개의 건설적인 지적을 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충고여도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는 조직을 와해한다는 게 그 배경이다.
블루보틀은 손님을 대할 때도 눈을 마주치고, 이름을 불러주는 방식으로 서비스 한다. 진동벨이나 원격 주문 시스템도 없다. 하지만 예외 없이 모든 손님에게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커피의 맛을 상세히 설명한다. 사실 이런 시스템은 일반 카페 아르바이트와 비교하면 힘들고, 또 귀찮다.
1년의 정규직 실험, 팬이 된 직원들
1년의 '정규직 실험'은 많은 것들을 바꿔놨다. 오늘 쉬는 날인 직원도 블루보틀 다른 지점에 가서 하루를 보내고 온다. 짧은 시간에 팀원들 간 생겨난 유대감과 연대로 ‘손님보다 직원이 먼저 열광하는 브랜드'가 됐다. 이건 1년 간 주요 상권에 5개의 지점을 내는 빠른 속도에도 서비스 품질이나 잦은 이직 등의 잡음이 없었던 비결이다.
몇 년 전 브라이언 미한 블루보틀 CEO와 마이클 필립스 커피문화책임자를 만났을 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이거였다. “블루보틀은 카페 동선을 짤 때 손님 먼저가 아니라 바리스타와 일하는 사람에게 최적인 동선을 먼저 생각해요. 일하는 사람이 힘들면 어떻게 손님을 즐겁게 맞이하나요?”
공간이 바꾸는 커피 문화
블루보틀은 미국, 일본, 한국, 홍콩의 로스터들끼리도 모든 것을 공유한다. 새로운 생두를 로스팅할 때 똑같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식과 프로파일을 공유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새 매장을 낼 때마다 서로 도와주는 건 기본이다. 미국에서 온 브랜드는 이제 무국적의 커피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뉴욕 시티오브세인트 카페 출신으로 블루보틀코리아의 총괄로스터를 맏고 있는 이윤형 씨는 "로스터는 혼자 많은 걸 책임져야 하는 외로운 직업 중 하나이지만, 블루보틀은 미국 본사와 일본 한국 홍콩 등에 흩어져 있는 로스터와 바리스타들이 실시간 소통하며 서로 돕는 문화가 있다"며 "이 점을 업계의 다른 로스터들이 가장 부러워한다"고 했다. 한국에 새 지점을 낼 때마다 미국, 일본의 바리스타팀이 기동대처럼 움직여 매번 서울을 찾아오기도 했다고.
곧 문 여는 광화문점을 포함해 블루보틀은 '공간 마케팅'으로도 주목 받고 있다. 각각 다른 공간을 통해 점포마다 오는 '단골'들이 다르다. 성수 1호점은 오래된 건물의 재생 건축을 도입해 20대들의 '인증샷 놀이터'가 됐다.
1층과 지하 1층의 경계를 없앤 과감한 공감으로 어디서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오는 명소라는 평가를 받는다. 삼청동 상권은 주변 한옥과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역삼점과 압구정점은 직장인 단골이 많다.
카페, 그 이상의 커뮤니티로
블루보틀의 1년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뉜다. '다가가기 어려웠던 스페셜티 커피를 쉽게 즐기게 했다'는 것과 '화려하게 진출한 초기 마케팅에 비해 큰 반향은 없었다'는 것. 서혜욱 블루보틀코리아 대표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강남에 세 곳, 곧 문 여는 곳을 포함해 강북에 세 곳을 열고 나면 이제 블루보틀은 지역 커피 문화를 바꾸는 브랜드가 될 준비를 마친 셈이라는 것.
1년 전과 달리 각 지점별 바리스타와 손님들의 유대관계가 끈끈해진 건 '정직원 채용'과 '소통하는 커피 문화'를 강조한 영향이다.
폐쇄적이라고 평가 받던 커피 업계에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것도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성수 1호점은 블루보틀이 생긴 이후 골목마다 20~30대가 창업한 스페셜티 카페들이 10여 곳 더 늘었다. 커피 투어를 하러 온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블루보틀 외 다른 카페도 찾아 다니고 있다.
성수 지역 바리스타와 로스터들은 블루보틀 바리스타들과 서로의 커피 맛을 비교·평가하면서 성수점을 '커피인들이 모이는 사랑방'으로 바꿔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