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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Jul 06. 2024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법무사> 7월호 '명문장으로 읽는 책 한 권' 서평 연재

https://ebook.kabl.kr/magazine/ebooks/202407/77/index.html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



세월이 흘러 가장 많이 회고하는 시기가 있다면 아마도 젊은 날일 것이다. 도전하고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불완전한 나이다. 학창 시절의 우정, 시기와 질투, 허세가 공존하는 가운데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성인이 되어간다. 치기 어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누군가의 삶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서툰 관계와 미숙함이 빚어낸 상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억되고 더뎌진다. 상처 준 사람의 기억은 흐려지고 상처받은 사람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 나이 듦, 시간, 기억의 왜곡 등에 관한 묵직한 주제로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다. 이 책은 40년 세월이 흘러 개인의 역사 속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한 남자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살아온 시간과 기억을 곱씹으며 인생의 의미를 알아간다.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1946년에 영국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현대 언어를 공부했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사전’ 편찬, 문학잡지 칼럼 기고, TV 평론가 등 폭넓은 분야에서 일했다.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첫 소설 『메트로랜드』로 ‘서머싯 몸 어워드상’(1980)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 『플로베르의 앵무새』, 『잉글랜드, 잉글랜드』, 『아서와 조지』 등 장편 소설과 단편집, 수필집을 발표해 다수의 상을 받았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영연방 최고 문학상인 맨부커상(2011)을 수상했다. 이 책은 줄리언 반스의 작품세계를 가장 집약하는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는 ‘전후 영국이 낳은 가장 지성적이고 재치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1-12쪽)     



이 소설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웹스터)이 노년이 되어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다. 웹스터는 학창 시절 단짝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대학생이 되어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사귀다가 성적 불만과 계층 차이로 이별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짝 친구였던 에이드리언에게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편지를 받고, 그 후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아무도 그 자살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직장에 다니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노년이 된 그는 “더디게 하는 감정”과 가끔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12쪽)하는 시간 속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웹스터는 기억하지 못했던 젊은 날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자신이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가 엄청난 파국을 불러왔음을 알게 되고, 그 실마리를 찾아간다. 그가 기억하는 것과 “실제로 본 것”(11쪽) 사이에는 어떤 진실이 존재하는 걸까.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 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101쪽)     



학창 시절 웹스터와 친구들은 적당한 허세와 비딱한 사고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해 마지막 역사 시간에 조 헌트 선생님이 “그 모든 세기를 돌아보며 결론을 도출해 보라고” 말하자, 웹스터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넉살 좋게 단언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노년이 된 그는 지나온 시간의 퍼즐 조각을 맞추며 불편한 진실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인생은 죽는 날까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웹스터는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에게 받은 상처만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그들의 삶에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의 행적을 좇아가며 기억을 재구성하는 그의 여정을 통해 개개인의 기억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돌아보게 한다. 그의 말처럼 지나온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나이 듦, 기억, 후회, 윤리를 파고드는 심리스릴러 소설이다.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세련된 문체와 풍자 속에서 재미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짧은 분량의 소설인데도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예기치 못한 결말이 책을 바로 떠나보낼 수 없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물망처럼 연결된 관계 속에서 각자의 기억이 갖는 한계와 왜곡 등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의 인생과 우리의 인생이 겹친다. 특별히 아쉽거나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한 남자가 자신의 지나온 역사를 회고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았다. ‘당신의 더뎌진 감정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기억은 괜찮은가요?’라고 되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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