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작가 Oct 23. 2020

생각보다 잘 해내고 있어요

내 돈벌이 경력 중에 가장 길게, 최근까지 한 일은 ‘마케팅’이다. 야근과 철야를 불 싸지르며 ‘나 좀 일하는데’ 하룻강아지 미쳐 널 뛰던 시절을 지나, 응당 마케터라면 유행에 뒤쳐질 수 없으니 트렌드를 따라 번아웃 상태에 빠졌다. 솔직히 지친 건지, 싫증이 난 건지, 그냥 놀고 싶은 건지… 끙끙 앓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글도 쓰고 싶고,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고, 유튜브도 하고 싶고, 성우도 해보고 싶고… 꿈을 펼쳐 보겠다며 그럴듯한 핑계를 댔지만 실상은 내 ‘업’에 대한 애정도 확신도 자부심도 모두 바닥나 있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초라하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마케터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당당하게 ‘나는 마케터입니다’라고 할 수 없는 현실이 무서웠다.



일을 그만두니 당황스럽게 헛헛함이 몰려왔고 그 빈자리를 책으로 채웠다. 놀기에는 양심이 찔리고 공부하기는 싫은데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을 때 독서가 제격이다. 나름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위안이 된다. 


잘 읽지 않았던 소설을 실컷 보고 평소 즐겨보던 마케팅 관련 서적이나 마케터가 쓴 책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제목이 좋아서 표지가 예뻐서 그냥 끌려서 읽자 하면, 참나 광고쟁이나 마케터들이 쓴 책이 다반사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애써 눈을 돌렸던 마케팅 관련 책들을 연달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그러니까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 책을 낼 정도의 수준을 가진 그들이 쓴 책을 읽어 보니 상당 부분 나와 비슷한 마케팅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일’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잘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쫌 하네. 그런 자랑이 아니라 그간의 마음고생을 위로받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쫓겼고 실수만 곱씹었다. 쉼 없이 스스로를 깍아내리고 여기까지라 한계선을 긋기 바빴다. 전부는 아니지만 잘하는 것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가끔은 나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꽤 오랜 시간 몸을 담았던 ‘마케터’라는 바다에서 물은 먹더라도 떠밀리지 않고 버텨냈는데 말이다. 



어쩌다 하루는 코너에 몰린 위축된 마음을 고생했다. 장하다. 다독여야지..

어느 날 벼랑 끝에 서 있다면 내가 제일 먼저 손 내밀어줄 테다.

한 없이 초라하고 형편없이 느껴지는 날은 매운 닭 발에 오돌뼈 추가해서 시켜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은 좀 하지 맙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