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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Nov 13. 2024

고아낸 실력으로 GO

‘곰탕’은 참 맛있다. 뽀얀 국물에 소금간을 약간 하고, 후추를 후추추 뿌린 후, 밥을 말아, 깍두기와 함께 먹으면 배 속이 든든해진다. 마음이 허할 때, 지금처럼 추운 계절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소울푸드처럼 곰탕을 먹는다. 뜨끈한 음식을 먹으면 추운 기운도 사라진다.      


곰탕이 왜 곰탕일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곰이 들어가서 곰탕인가?’와 같은 생각은 초등학생 때 이미 끝냈고, ‘그 곰은 북극곰일까?’라는 말장난은 지금도 가끔 하지만, 국어 선생님이 되어 사전을 찾다 알게 된 것은 ‘곰탕’의 ‘곰’이 동사 ‘고다’의 명사형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말 ‘고다’는 ‘고기나 뼈 따위를 무르거나 진액이 빠지도록 끓는 물에 푹 삶다.’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을수록 더욱 진한 국물을 만날 수 있다.     

 

얼마 있으면 수능이다. 내가 옆에 끼고 가르쳤던 고3 수험생 아이가 자신의 실력을 평가 받는 날이다. 이 아이는 문제를 풀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단어가 나오면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다 확인하고 넘어갔다. 그러면서도 문학 지문을 볼 땐, 내용 그대로 다 흡수하는 아이였다. 고전 소설 속 역모를 꿈꾸는 인물을 보면, ‘어허~’ 소리를 내면서 혀를 끌끌 찼고,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시를 보면, ‘어머나~’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는, ‘얘는, 이 작품들을 수능에서 만나게 되어 퍽 아쉽다. 시험이 목적이 아닌 상황에서 이 작품들을 다시 만난다면 얼마나 많은 감상을 이끌어 내며 작품 속에 푹 빠지게 될까?’ 생각했다.   

   

선택지 하나하나도 납득이 가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아서, 한 문제 한 문제 넘어가기가 참 쉽지 않았다. 덕분에 수업하는 시간에는 아이도 나도 인내가 필요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스터디룸에서 우리는 푹푹 찌는 열기에 사실상 고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을 한 주 앞둔 일주일 동안, 이 녀석은 아예 학교가 가지 않고 아침부터 나를 만나 문제를 풀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하러 가는 것이 참 고되었지만, 이 녀석 덕에 좋아하던 아침 라디오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했다. 삶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겠다 생각했다.      


고3 시절을 겪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사실 고3의 시련과 고난보다 그 이후의 삶에서 만나게 될 고난이 더 크다는 것을. 하지만 그 세월을 살아보지 않은 고3들은 자신들이 제일 힘든 법이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쌓여갔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글을 읽고, 다섯 개 중에 답을 고르고, 모르는 내용이 나올 때 한숨도 쉬어가며 속 끓이고 지냈던 시간들은 어쩌면 ‘곰탕’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날들은, 인내의 시간을 견디며, 실력을 고아 내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 한 번은 문제를 풀었는데, “난이도가 들쑥날쑥이에요. 이건 또 왜 이렇게 쉽지?”라고 말하길래, “네가 열심히 노력해 온 시간이 지나서 너의 실력은 향상되었고, 그래서 문제는 쉬워진 거 아닐까?”라고 말해 주었다. “에이~ 말도 안 돼요!”라고 그 아이는 말했지만, 나는 봤다. ‘정말 그런가’ 싶은 마음이 담긴 희망에 젖은 눈빛을. 이렇게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세상은 상대적으로 흘러갈 거라는 것을 이 아이도 곧 알게 되겠지?     


충분히 고아 낸 우리의 실력을 이제 시험장에 들어가 충분히 펼치기만 하면 된다. 이제는 주저함 없이 그냥 나아가면 된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건, 충분히 고아낸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고다’는 이제 ‘GO다’로 탈바꿈되었다. 기세로 밀어부쳐 나가고, 행복하게 시험장에서 돌아왔으면 한다. 그리고, 수능은 끝이 아니라, 계속 ‘GO아 나가야’ 할 시작이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 고민하고, 꿈을 키워나가길 바란다.      


아이와 함께 읽었던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빛나라, 별들이여, 빛나라, 편백나무여 / 세상에 빛나지 않는 게 어디 있는가(황동규, <세일에서 건진 고흐의 별빛>)’. 빛나지 않는 건 세상에 없다. 빛나라, 고3들이여, 빛나라, 꿈꾸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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