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을 보며 생존의 기본을 돌아본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다시 뜨거워졌다. 한 달 전 대통령의 방미 때만 해도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분위기였지만 상황은 급반전 했다. 미국에 대한 직접 투자를 약속하면서 공장 건설이 진행 중이던 조지아주 메가플랜트에 미국 이민단속국이 들이닥쳐 일하고 있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단속해 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방송을 타면서 전 국민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무사히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한국 기업들은 대미 투자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지체되고 있던 관세 협상의 세부 내역들도 하나씩 공개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자연스러운 미국 진출 형태의 투자를 생각했던 정부의 계획과는 달리 트럼프 정부의 요구는 노골적이었다. 485조 원에 달하는 재원을 현금으로 그것도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 미국이 지정한 펀드에 입금해야 하고 그 펀드가 어디에 투자할지는 미국이 결정하길 원했다. 그리고 원금이 회수되기 전까지는 9:1로 이익을 나누다가 원금을 환수하고 나면 1:9로 미국이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가기를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조건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불평등 계약인데, 일본은 원금 회수 전 비율을 5:5로 하기로 이미 합의해서 서명했고 한국도 그렇게 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광우병 미국산 소고기 사태도 관철시켰던 우리나라 국민인데 멀쩡한 사람들 구금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의 불평등 협약이면 반대 여론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결정은 이런 감정보다는 실익에 기반을 두어야 하니 한번 이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와 받아들였을 때의 득실을 따져 보자.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무역 흑자 상대국은 미국이다. 2024년 한국의 대미 수출액은 역대 최고치인 약 1,280억 달러를 기록했는데 이는 전체 수출액의 18.7%에 해당한다. 자동차와 반도체가 주요 품목으로 무역수지 흑자만 557억 달러에 달한다. 무역 수지 적자 폭을 줄이고자 하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한국은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대상국임은 확실하다.
그동안 미국에 이런 큰 수출액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12년부터 시작된 FTA가 있다. 2.5%로 애초에 미국은 관세가 낮기는 했지만 그래도 타 지역 특히 중국보다는 훨씬 낮은 관세 덕분에 한국은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창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Renault Korea 부산 공장에서 한동안 생산해서 미국으로 수출되었던 Nissan Rogue나 한국 시장 내수는 월 2,000대가 채 되지 않지만 수출은 47만 대나 하는 GM Korea가 있다. 자동차 산업에 있어 북미 시장은 산소호흡기처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사실 관세가 올랐다고 해서 이 모든 수출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제품들은 비싸도 우리나라 제품만을 사야 하는 항목들도 있다.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FTA 계약은 무시되고 25% 관세가 부여되고 있지만 북미 수출액은 전년 대비 4% 정도만 감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5%가 15%로 낮아진다고 해서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수출액이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세의 영향이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 산업연구원의 예측에 따르면 15%로 합의된 관세가 25%로 다시 높아지게 되면 대미 수출액은 10% 정도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수출액이 줄어들면 국내에서 그만큼 생산되는 부가가치가 줄어들고 그 규모는 연간 약 27조 원 수준이다. 안 그래도 1% 이하로 낮아진 성장률에도 적어도 0.4% 이상 악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냥 미국이 하는 짓이 얄미워서 협상을 거부하기에는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너무 큰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다시 협상으로 돌아가서 만약 미국이 당장 벌금처럼 485조 원에 달하는 돈을 내놓아야 한다고 하면 당연히 거절하는 것이 맞다. 3년 반 남은 트럼프 임기 중 100조 원 손해 안 보려고 485조 원을 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되고 있는 건 투자 금액이다.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후에도 미국 시장을 중심으로 수익을 꾸준히 얻을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정부는 이번 투자의 조건을 수익을 담보할 수 있는 모양새가 될 수 있도록 협상을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정부가 세금을 들여 투자를 할 수는 없으니 민간 자본이 자연스럽게 미국에 투자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형식이 이루어지도록 투자의 형태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는지는 투자하는 기업이 시장의 상황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트럼프 정부 말기까지 무조건 입금해야 한다는 기한이 정해지면 미국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도 억지 투자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전체 투자를 몇 단계로 나누어 이전 단계가 목표했던 수익을 달성하면 다음 단계 투자를 진행하는 것과 같은 안전장치를 마련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합리적인 조건들은 뭐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웬만한 사적 펀드들도 투자를 할 때 반드시 고려하는 기본적인 것이라서 이미 협상단도 충분히 미국에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그 아래 협상단들은 죄다 무시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입장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 협박이 무서워 그냥 사인해 버리는 일본 같은 나라도 있지만 (실각이 두려워 사인을 승인한 이 시바 총리는 결국 사임했다. 사람은 갔지만 계약은 남아 일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유럽이나 다른 국가들은 여전히 우리와 비슷한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다행인 것은 관세를 높이면 우리도 손해지만 미국도 손해다. 그동안 쌓여 있던 재고로 어떻게든 버텨왔던 미국의 물가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우리 수출이 줄어든 만큼 미국의 소비는 줄어들고, 소비가 줄어 돈이 덜 돌기 시작하면서 실업률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민국의 단속으로 값싼 노동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미국의 제조업은 더욱 경쟁력을 잃어가고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계획은 더욱 안갯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국에 들어온 유학생을 단속하겠다며 하버드와 맞붙더니 유학생 없이는 재정 확보가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오히려 중국 유학생을 60만 명으로 늘리겠다는 정책을 발표할 만큼 현재의 미국은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
이런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번영해 왔던 ‘팍스 아메리카나’는 이제 스스로 문을 닫고 있다. 그리고 경제나 안보나 기울어지는 제국에 의존해서는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총성은 없지만 어느 때보다 치열한 이번 관세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도 약속을 지키고 공생을 고민하는 파트너를 찾아 연대를 이루는 쪽이 유리하다. 이번 조지아 공장 구금 사태는 피해자 분들께는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 미국의 민낯이 공유되고 우리의 입장을 더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새로운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 전 세계가 우리나라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다. 그 덕에 우리도 이렇게 15% 관세 숫자 이면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니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접근하자. 서로 버티면서 전선을 지키는 참호전에서는 못 참고 고개를 드는 쪽이 항상 먼저 당한다. 그리고 장기전에서 가장 불리한 쪽은 고립된 쪽이다. 든든한 후방의 지원은 가장 큰 힘이 된다. 지금은 빨리 합의보라는 닦달보다는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 모두의 뜻을 모아 제대로 된 협상이 될 수 있도록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다 같이 고민해야 한다.
(여담) 작년 12월 계엄이 다행이다 싶은 건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자동차 산업동향 플랫폼 아우토바인에 기고한 글을 공유해 봅니다. 협상은 늘 급한 쪽이 지는 거라지요. 시간이 우리 편이 될 수 있도록 잘 버티게 힘을 실어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