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관세 전쟁을 시작한 지도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스스로 장벽을 높이면 고립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유럽도 일본도 미국과의 협상을 타결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투자 약속을 하면서 트럼프가 미국 내에서 자랑할만한 보따리를 한껏 가져가서 15%로 낮추어 준 것에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15% 관세가 부과되는데 미국은 FTA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불평등도 이런 불평등이 없다.
이렇게 미국이 제멋대로 굴면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끼리 새로운 무역의 블록을 형성하려는 시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미국이 국제 교역에서 외면되면서 달러를 기축으로 하는 패권이 흔들리는 상황이 우려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스캇 베센트 미 재무 장관은 간단하게 말했다. “흑자국들끼리 모여서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시장에서는 돈을 쥐고 물건을 사려는 측이 갑이다. 물건을 팔아야 하는 쪽에서는 사주는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그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3억 4천만 명의 인구에 1인당 GDP가 8만 달러를 넘어서는 미국의 구매력은 그만큼 강력하다. 관세로 인한 인플레와 트럼프의 감세 정책에 갇힌 금리와는 별개로 전 세계의 기업들은 미국 시장을 공략해야 성장이 가능하다. 지난 30여 년의 자유 무역과 제로 금리의 시대를 통해 세계가 만들고 미국이 소비하며 다 같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에 익숙해져 버렸다.
전기차 시장도 마찬가지다. 친환경 트렌드를 역행하는 각종 정책들이 이슈가 되고 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미국 자동차 시장 자체가 너무 크다. 신차 중 전기차 보급율이 10% 수준이지만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는 중국을 제외하면 2024년에만 134만 대를 판매하면서 단일 국가로는 가장 많은 전기차가 팔렸다. 유럽 전체가 200만 대, 우리나라는 50만 대 수준임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다. 낮은 비중은 그만큼 앞으로 성장할 잠재력도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절대 강자는 테슬라였다. 시장의 48%로 절반에 가까운 비중으로 다른 경쟁사들을 압도했지만, 트럼프 정부에서 한바탕 한 일론 머스크 CEO 리스크에 중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저가형 Model 3의 단종까지 겹치면서 올해는 40%대 초반으로 매출이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빈틈을 채우고 있는 것은 토종 브랜드 GM이다.
지난 2분기 매출 현황을 보면 Tesla가 143,535대로 전년 대비 12%나 감소한 반면 GM은 46,280대로 오히려 +111% 상승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테슬라가 비호감이 되고 제네시스, BMW, Mercedes-Benz 등 수입 고급 전기차들의 가격이 관세로 올라간 기회를 GM이 제대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GM은 지난해 출시한 쉐보레 이쿼녹스 등 신차 전기차 가격을 크게 낮추었다. 흔히들 캐즘으로 일컬어지는 10% 시장 점유율을 갓 넘어서는 미국 전기차 시장도 고급재 경쟁에서 가성비 경쟁으로 전환됨을 체감할 수 있다.
전기차의 가격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배터리다. GM이 자신들의 대표 전기차인 VOLT의 신모델에 최근 중국산 LFP 배터리를 탑재하기로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23년부터 기존 모델의 생산을 중단한 VOLT는 GM의 대표적인 Entry 전기차 모델이다. 가성비 경쟁의 대표 모델로 최대한 저렴하게 만들어 시장 점유율을 늘려가겠다는 GM의 계획은 트럼프 정부의 중국산 80%에 달하는 관세로 흐트러졌다. 일반적으로 배터리와 플랫폼을 정하고 개발하는 기간이 최소 2년은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기존에 개발해 놓은 LFP 배터리 활용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답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CATL의 배터리가 NCM 대비해서 30% 이상 더 저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배터리 가격의 80%에 달하는 관세를 고려하면 적정한 수익률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차는 개발했던 사양으로 출시하되 빠른 시기에 LGES와의 합작회사인 Ultium Cells에서 양산 준비 중인 북미산 LFP 배터리로 대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동안 중국산 LFP 배터리에 성능에서나 가성비에서나 경쟁이 되지 않았던 LGES로서는 80% Demerit가 붙은 배터리라면 충분히 상대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미 양산한 차량에 되도록 빠르게 적용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도 LFP 배터리를 개발 생산해서 검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중국산 배터리의 대체제를 찾아야 하는 것은 비단 GM만의 이슈가 아니다. 중국산 LFP배터리를 사용하던 테슬라도 모델 3 저가 모델을 유지하려면 미국산 LFP 배터리가 필요하다. 중국 모델을 기반으로 도요타에서 생산하는 BZ4X 모델이나 최근 AESC에서 납품이 취소된 BMW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곧 르노 코리아 부산 공장에서 생산할 예정인 폴스타 4처럼 미국 내 생산이 아니더라도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모델들도 모두 시작은 중국산 배터리로 시작하지만 북미 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배터리 국산화가 필수다. 모델들 모두가 이런 식의 배터리 신분 세탁이 필요한 셈이다.
결국 관세 전쟁은 미국을 고립시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미국 시장을 두고 중국산 제품을 제외한 새로운 경쟁체제를 만들어졌다. 특히 전기차 부문에 있어서는 압도적인 가성비로 시장을 휩쓸었던 중국산 배터리와 전기차가 배제된 상황에서 호랑이가 없는 시장에 여우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차량보다는 ESS 위주로 LFP 배터리 개발에 실적을 보였던 우리나라 배터리회사로서는 관세와 규제 장벽으로 울타리가 든든하게 쳐져 있는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용 LFP 배터리를 상용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중국 정부를 뒤에 업은 중국 배터리 회사만큼의 가성비를 확보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중국만 제외하면 우리나라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은 확실한 비교 우위에 있다. 크게 뒤처져 있던 양산 기술을 따라잡고 현지화한다면 원하는 회사들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기존의 NCM 대비 가격 경쟁력이 있고 성능도 확보되는 LFP 배터리 확보가 필요한 순간이다.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자동차 산업 동향 전문 플랫폼 아우토바인에 기고한 글을 조금 늦게 공유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헤어질 결심을 했다면 우리가 그 빈자리를 채울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