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ol, 2015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뉴욕의 크리스마스, 백화점에서 점원과 손님으로 만난 테레즈(루니 마라)와 캐롤(케이트 블란쳇)은 첫눈에 서로에게 강한 이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캐롤이 놓고 간 장갑을 통해 둘은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195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특유의 영상미와 잔잔한 분위기로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나 영화는 20대 여성들의 높은 평점을 받으며(출처: 네이버 영화) 대다수의 젊은 층의 여성들이 이 영화를 인생영화라고 칭한다. 영화의 주제가 단순히 ‘여성간의 사랑’이 아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 표현들이 이 현상에 한 몫을 하지 않을까? 또한 극중에서의 케이트 블란쳇의 눈빛은 남녀를 불문하고 수많은 이들을 빠져들게 만들며 관객들에게 여운을 남겼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잔잔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잘 풀어냈다.
둘의 첫 만남은 여느 로맨스 영화와 다를 것 없이, 많은 군중 속 마치 이 공간에 캐롤과 테레즈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시작한다. 이 뻔하다면 뻔하다고 할 수 있는 둘의 첫 만남 씬은 극 중 캐롤의 오묘한 눈빛 때문인지 ‘설렌다’기 보다는 조금은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의 초반에는 주체적이지 않은 테레즈가 등장한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청혼에도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는 오늘 먹을 점심메뉴 조차 결정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극 중의 테레즈는 1950년대 대부분의 미국 여성들을 반영하는 수동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테레즈를, 캐롤은 질책하지 않으며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테레즈에게 의사를 물을 때, 그녀는 절대 재촉하지 않으며 테레즈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게 캐롤은 묵묵히 테레즈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부여한다.
테레즈를 존중하는 캐롤의 태도 때문인지, 같이 여행을 떠나자는 캐롤의 제안에 테레즈는 망설임 없이 긍정의 대답을 한다. 캐롤과 테레즈는 첫 만남을 포함해 총 3번이라는 비교적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테레즈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캐롤을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 자신이 무엇을 먹을지도 선택하지 못하던 테레즈가 모든 일을 내려놓고 어떠한 조건도 없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테레즈의 모습이 조금은 놀라웠다. 이는 테레즈가 캐롤을 만나며 점차 능동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보고 머리가 띵했던 장면이다. 1950년대 이런 생각을 가진 여자가, 아니 사람이 어디 있었을까? 특히나 캐롤에는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점보다 약 70년 정도 지난 현재에도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데, 여성에 대한 억압이 극심했던 시대의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많이 등장시키는 것은 영화에서 의도되든 의도되지 않았든,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또한 극중에서 캐롤이 테레즈에게 담배를 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담배를 피나요?’라는 질문보다는 ‘담배 줄까요?’라고 권한다. 사소한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장면에서는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인식되었던 담배가 여성 또한 당연하게 소비할 수 있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테레즈의 남자친구는 캐롤과 여행을 떠난다는 테레즈의 말에 매우 격분하며 테레즈를 꾸짖는다. 이 부분에서는 그가 평소에 테레즈를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나 테레즈의 결정을 전혀 존중하지 못하고 ‘너는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꺼야’라며 악담을 퍼붓는 모습은 테레즈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캐롤과 아주 상반된다는 느낌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또한 테레즈에게 자신의 희생을 강조하며 그녀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발하는 모습은 왠지 캐롤의 전남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을 보며 조금은 우유부단한 테레즈가 그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마음을 바꾸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테레즈는 오히려 그의 희생이 자신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며 꾸짖는 모습을 보였다. 이 모습에서 테레즈가 이제는 완전히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를 추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케이트 블란쳇’과 ‘캐롤’
많은 한국의 여성들이 극 중에서 캐롤 역할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을 롤 모델로 삼고 있으며 영화를 본 여성들은 ‘그녀의 눈빛을 나도 한번이라도 받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가 단지 ‘캐롤’이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일까?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남성들은 남자가 여자를 서포트 하면 남성성이 약화된다고 느끼는 거 같아요. 웃기는 생각이죠”
“저는 제 아들 셋에게 이렇게 가르쳐요. ‘여자를 이렇게 훑어보면 절대 안돼’”
그는 수많은 할리우드 배우 중에서도 아주 잘 알려진 페미니즘 배우이다. 오래 전부터 그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으며, 특히나 ‘칸 영화제’ 등의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영화계에서의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미국의 여성은 물론, 한국의 여성들 또한 용기 있는 그의 모습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올해 주최된 ‘칸 영화제’에서 경쟁부분 심사위원장을 맡았으며, 이 영화제에서 케이트 블란쳇을 포함한 여성영화인 82명이 레드카펫 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이 숫자는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초청된 여성 감독의 작품수를 의미한다고 한다.(참고로 남성 감독의 출품작은 1645개)
이러한 그의 독보적인 페미니즘적 행보는 영화에서의 ‘캐롤’과 현실에서의 ‘케이트 블란쳇’을 겹쳐 보이게 하기 충분하다. 꾸준히 페미니즘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우리들은 단순히 그가 ‘캐롤’이어서가 아닌, 그가 ‘케이트 블란쳇’이라서 그 자체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1950년대의 미국에서는 대학에 진학한 여학생들의 3분의 2가 도중에 자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대부분 ‘결혼’이었다. 또한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부’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1950년대 미국의 사회는 여성을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저 사회의 모든 일은 ‘남성’의 것이었으며 여성들은 그저 그들을 뒷바라지 하며 남편이 하라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수많은 미국여성을 반영하는 테레즈라는 캐릭터가 평등을 꿈꾸는 캐롤를 만나 변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짜릿하다고 느껴졌다. 영화에서 그녀가 점차적으로 변하는 모습들은 마치 현대의 우리나라 여성들을 보는 듯 했으며, 1950년대의 수동적인 여성이 되게끔 하는 미국의 사회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사회와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의 배경과 닮은 구조 속에서 우리 사회의 ‘캐롤’들이 속속히 등장하고 있다. '캐롤'이 된 우리는 ‘테레즈’들을 꾸짖지 말고 기꺼이 그들만의 ‘캐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