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징쌤 May 27. 2024

가는 길에 고객 분들 좀 모셔다 드리세요

갑질과 파트너십 사이 (1)

우리 제품의 제조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미국에서 콘퍼런스를 연다. 전 세계 여기저기에서 우리 제품을 애정을 가지고 쓰는 사람들이 이 행사에 참여한다. 나는 운 좋게 회사의 지원을 받아서 그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제조사의 한국 지사에서는 우리 제품을 잘 쓰고 있는 고객사 담당자들도 콘퍼런스에 초대했다. 그들 중 몇몇은 회사의 승인을 받아서 콘퍼런스에 같이 가게 되었다. 먼 곳까지 같이 갔다 보니, 콘퍼런스에 함께 간 고객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고객과 함께 밥을 먹다니, 한국이었다면 꽤나 긴장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콘퍼런스 자체가 축제처럼 신나기도 했고, 먼 나라에서 한국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느낌도 들어서 한국에서보다는 훨씬 편하고 밝은 분위기에서 밥을 먹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고객들과 우리 회사 사람들끼리 먼저 자리를 시작했다. 즐거운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1차가 끝날 때쯤 제조사 사람들도 왔다. 그들은 따로 일정이 있어서, 그 일정 마치고 오느라 조금 늦게 온 것이었다. 그때 왔던 제조사 사람들 중에는 우리 회사 같은 파트너사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은 자기들끼리 가졌던 식사 자리에서 술을 좀 먹어서 그런지 이미 자세가 좀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고객에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 때문에 좋았던 식사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당사자가 그 사람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넘어갔던 것 같다. 


식사 자리는 2차까지 이어졌고, 밤 12시쯤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으레 그러하듯 식당 앞에 둥그렇게 서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앞서 말했던 그 파트너 지원 담당자가 나에게 한마디 했다. 고객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모셔다 드린 다음 나의 숙소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마치 그 사람이 나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해서 그랬던 것 같다.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제조사의 다른 직원이 그 사람을 말려서 그 자리는 별 일 없이 마무리되기는 했다. 고객들도 숙소가 별로 멀지 않아서 자기들끼리 들어가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에 제조사의 본부장님이 직접 나에게 와서 전날 있었던 일을 사과하셨기 때문에 나도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사실 내가 고객을 숙소까지 데려다주면 나도 고객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은 없다. 우리 회사는 제조사와 힘을 합쳐서 함께 일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조사의 도움이나 배려가 필요할 때도 있다. 제품에 대한 마케팅 활동을 할 때, 제조사의 홍보 채널을 이용하면 우리 회사 자체적으로 홍보할 때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고객이 제품 자체의 작동 원리나 보안 설정에 대한 것을 물어보면 제조사의 기술 지원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조사와 우리 회사의 관계가 결코 갑과 을의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조사 또한 우리 회사를 지렛대 삼아 어려운 일을 처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몇몇 고객사에서는 제품을 사면서 제품을 활용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하기도 한다. 또는 제품을 잘 쓰기 위한 교육을 해달라고 하는 고객도 있다. 제품을 활용해서 만든 시스템에 오류가 나서 급하게 기술 지원을 해달라고 하는 고객도 있다. 제조사에는 이런 프로젝트나 교육이나 기술 지원을 감당할 만한 인력이 없다. 이 모든 일을 제조사에서 직접 하기 위해서 사람을 잔뜩 뽑을 수도 있지만, 우리 제조사를 비롯한 많은 글로벌 IT 솔루션 업체들은 국가별 지사의 규모를 키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이 많아지고 조직이 커지면 그 사람과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그만큼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제조사만 해도 한국 지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7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글로벌 IT 솔루션 업체들은 다른 나라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그 나라에서 어느 정도 기술력을 가진 회사들과 파트너 계약을 맺고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 파트너 사들이 그들의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파트너 사에 어느 정도 마진을 양보한다든지 독점 판매권을 보장한다든지 하는 혜택을 준다. 이 과정에서 제조사와 파트너사 사이에 갑을 관계가 만들어질 여지가 생긴다. 제조사는 파트너사로 하여금 고객에게 과도하게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또는 제조사는 고객과 계약할 때까지만 신경을 쓰고, 그 뒤에 필요한 교육이나 기술 지원 등의 일들은 파트너사에게 다 미뤄버린 채 나 몰라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내가 미국에서 겪었던 일도 이렇게 만들어진 갑을 관계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내가 서 있는 무대가 기울어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