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 사원의 정체성 찾기
영업 사원의 실적은 어느 고객사를 맡느냐에 따라 이미 70%는 정해진다고 한다. 크고 돈 잘 쓰는 고객사를 만난 영업 사원이 아무래도 좋은 실적을 거둘 가능성이 높다. 그런 고객사에는 영업 활동을 특별히 많이 하지 않아도 소소한 계약 건들이 끊이지 않고 만들어진다. 또한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큰 건도 꽤나 자주 만난다. 영업 사원들은 개인별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로 협업하기보다는 경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좋은 고객사를 맡기 위해서 영업 사원들끼리 서로 심하게 싸우기도 한다. 그렇게 몇 번 싸우고 나면 사무실에서 마주쳐도 인사조차 안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외국계 회사에서 이런 경향이 더 심한 것 같다. 외국계 회사들은 우리나라에서 제품을 직접 개발하거나 생산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외국계 회사들의 한국 지사는 주로 마케팅과 영업 조직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자연스럽게 한국 지사의 실적도 영업 실적에 따라 매겨지게 된다. 우리 회사와 협업하는 제조사의 분위기도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제조사의 영업 사원들은 단기적인 실적 목표를 어떻게든 이루기 위해 무리한 계약을 맺기도 한다. 그런 계약은 분명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만, 그것을 지금 걱정하는 것은 사치이다. 나중 일은 자신이 그 회사에서 안 짤리고 계속 다녀야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고객사들의 사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기도 한다는 점이 또 재미있다. 내가 맡고 있는 고객사는 한국에서 우리 제품을 가장 많이 쓰는 곳이다. 적절할 때 적절한 만큼의 계약 건들이 잘 만들어져서 그동안 무리한 계약을 억지로 만들 일도 없었다. 그런 덕분에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게 잘 성장해 왔다. 제조사에서 이 고객사의 영업을 담당하는 사람이 작년부터 바뀌었다. 그는 이 고객사를 맡게 되었을 때, 좋은 고객사를 맡게 되어서 자신이 정말 운이 좋다고 했다. 전임자가 고객들과의 신뢰를 잘 쌓아두었기 때문에, 그는 새 고객사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고객들이 우리 제품을 이미 너무 잘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컴플레인을 받을 일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새롭게 영업할 빈자리가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제품이 많이 쓰이고 있는 만큼 예산 절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특히 영향을 많이 받는다. 새로 파는 건 없는데, 이전에 쓰던 것마저 줄이겠다고 하니 영업 사원으로서는 죽을 맛이다. 그래서 지금은 하필 이럴 때 이 고객사를 맡고 있다는 게 그에게는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되어버렸다. 영업 사원으로서 아무리 영업 계획을 세우고 영업 전략을 고민해도 통하지 않는다. 고객사에서 예산을 줄이겠다는 데에는 영업의 신이 와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른 고객사에서 여전히 매출이 늘어나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보면서, '우리 고객이 너무 빨랐어'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고객사에서 드디어 우리 제품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 고객사를 맡고 있던 영업 사원은 3년 동안 한 건도 거래를 만들어내지 못하다가 작년에는 모처럼 실적 순위 높은 곳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그에게 더 기쁜 소식은 그 고객사의 경우에는 소프트웨어를 한 번 사면 회사 전체의 표준 제품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에 앞으로 영업할 기회도 무궁무진하게 남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고객사의 다른 계열사나 관계사들까지도 차츰차츰 퍼져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면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제조사의 중요한 동력원이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항상 좋기만 한 것도 없고 항상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상황은 때에 따라 바뀐다. 그러니 어느 고객사를 맡느냐 뿐만 아니라 그 고객사를 어느 타이밍에 맡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럼에도 회사에서 영업 사원에게 월급을 주면서 일을 시키는 이유는 당연히 될 일에 대한 행정 처리를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업 사원의 미션은 안 살 것 같은 고객조차도 설득해서 계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업 사원은 그 대가로 높은 수당을 받는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그 수당 자체가 자신의 존재 의미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어버린 사람들 눈에는 모든 고객이 숫자로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고객의 성장을 도움으로써 매출을 만들어내고, 그 대가로 수당을 받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이야기일 것이다. 좋은 고객을 좋은 타이밍에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쉽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단기적인 실적의 압박을 견디면서, 고객을 숫자로 보지 않고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불현듯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하며 허탈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영업 사원으로서 산다는 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팀장님은 영업 사원으로서 거의 20년 가까이 일을 해왔다. 그럼에도 가끔 '영업이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한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영업 사원이 된 지 3년쯤 되니 팀장님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