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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결국 가면무도회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

by 오징쌤

작년 말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큰 화제가 되었다. 너도나도 한강의 책을 읽겠다고 나서면서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다 채우게 되었을 정도였다. 나는 아직 한강의 책 중에서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두 권밖에 읽어보지 못했다. 그 두 작품 모두 아주 잘 쓰인 작품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이 어떤 흐름을 거쳐 나오게 되었는지 알아볼 생각을 못 했다. 이번 기회에 나도 사람들을 따라 한강의 책을 순서대로 읽어보면서 한강의 작품세계로 한 발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한강의 소설은 내 입맛에 잘 맞는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책에 흠뻑 빠져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란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진도는 생각보다 잘 나가지 않는다. 한 장면 한 장면 소화하는 데에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려서 그렇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나는 왜 사는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로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그가 나에게 던지는 것만 같다. 이런 질문들을 곱씹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린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들을 해내느라 허덕이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면 한동안 멍해진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는, 한강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다. 이전의 소설들은 그냥 넘기다가 이번 작품을 읽고 몇 자라도 쓰게 된 이유는 이 작품을 통해서 한강이 자기 속을 한 층 더 까뒤집어 보여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 작품들에서는 이렇게 얘기할까, 저렇게 얘기할까 하는 망설임이 느껴졌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망설임에서 벗어나서 '있는 건 있다고, 없는 건 없다고' 쿨하게 써 내려간 듯하다. 보통의 많은 사람들은 없는 걸 있다고 억지로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들을 걷어냈을 때, 무엇이 남을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대의 차가운 손>에서는 한강이 삶과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태어난다는 것은 누군가의 음부를 찢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사는 동안 아무리 발악해보았자 죽고 나면 결국에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하게 될 뿐이다. 태어나고 죽기까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먹는 것, 장기들을 움직여 소화시키면서 영양분을 빼먹는 것, 그러고 남은 것을 몸 밖으로 내보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겪는 일들에 온갖 의미를 덕지덕지 붙여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의미라는 것은 죄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지어낸 가면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산다. 아니, 오히려 그 가면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 것마냥 믿고 살기까지 한다.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감추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가면에 더욱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가면이 벗겨졌을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대의 차가운 손>은 각자가 자신의 가면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나는 느꼈다.


주인공 장운형과 그의 상대로 나오는 E라는 인물은 둘 다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면이 벗겨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면서 살아간다. 장운형이 사는 작업실은 서울 변두리 반지하에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 띌 일도 없고, 누구도 편하게 찾아오기 어렵다. E가 사는 오피스텔은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보안이 철저한 고층 건물이다. 눈에 잘 띄는 곳이다 보니 오히려 누구도 편하게 찾아오기 어렵다. 이렇게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 거리를 두면서 가면 뒤의 얼굴을 감추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둘만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장운형은 다른 사람의 몸을 석고로 떠서 조형물을 만드는 작가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석고로 뜬 적은 없다. 대신 다른 사람의 몸을 떴을 때 만들어지는 석고 조형물 안으로 들어가 몸을 누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곳은 검은 빈 공간일 뿐이지만, 운형에게는 무덤 같은 빈자리처럼 느껴진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 있으면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심연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솔직히 여태껏 내 삶의 심연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다만 요즘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있는 내가 살아가는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허무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그럴 때면 나도 혼자만의 골방에 가서 멍하게 드러눕는다.


그 허무함을 감추기 위해 나도 분명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 가면은 대체로 논리적인 척, 그러면서도 유쾌한 척하는 가면이다. 나는 누구든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시간을 편안하고 즐거웠다고 기억하기를 바란다. 거기에는 사실 누군가 나를 재미없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째서 나는 그런 가면에 그토록 신경을 쓰고 사는 걸까. 다행히도 그 가면조차도 요즘은 조금씩 벗어내고 있는 것 같다. 한 친구가 얼마 전에 나에게 '넌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냐'고 물었다. 나는 요즘 가면들을 벗어내고 있는 덕분에 별생각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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