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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Feb 01. 2021

혹시, 경상도 사나이식 애정 표현이셨나요?

"여기 관리인이시죠? 자릿세 얼마예요?"

낯선 아저씨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 아닙니더. 우리도 해수욕 온 사람들입니더."

아저씨를 보내 놓고 온 가족이 박장대소가 터졌다. 우리 캠핑장 포스가 그 정도였다니.

그래. 한번 찬찬히 둘러보자.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일단 타프까지 완벽히 친 세 동의 텐트, 아이들 수영복이며 수건, 티셔츠, 바지 등이 줄줄이 널려있는 빨랫줄, 당시만 해도 다른 집에는 잘 없는 접이식 탁자 의자 세트와 대형 파라솔, 그리고 그 옆으로 층층이 쌓여있는 플라스틱 의자들과 커다란 업소용 아이스박스, 마지막으로 절대 이곳이 일반 가정의 캠핑 일리 없다고 믿게 만들었을, 4단이나 쌓인 맥주 궤짝까지. 미니 군락의 모습. 맞네, 맞아. 이 집이 자릿세 내는 곳 맞네.


어린 시절에는 해운대 해수욕장 같은 곳도 자릿세를 누군가 돌아다니면서 받으러 다닐 때라 그보다 규모가 작은 바닷가는 자릿세 정산 시스템이 더 어설펐다. 우린 당연히 규모가 작디 작은 바닷가로 늘 다녔고 그러다 보니 이런 재밌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아. 이 집이 규모로 보나 세간 살림으로 보나 이 해수욕장에 하루 이틀 산 규모는 아닌 듯하고. 휴가철 동안 여기 터를 잡고 자릿세를 받는 관리인들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만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던 우리 3남매는 여름이면 숙제할 것 몇 가지를 챙겨서 바닷가 캠핑을 떠났던 기억이 있다. 기간은 처음엔 분명 1박 2일 내지 3박 4일이었는데 점점 늘어나더니 1주일이 되고 그러다 2~3주가 되는, 반 원주민까지 되어봤다.


초등학교 5학년으로 기억하는 마지막 캠핑의 기억은 이랬다.

그곳에서의 일상은 매일 비슷한데  할머니는 바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시며 소쿠리 한 가득 담치(홍합)며 고동, 께(아주 작은 게) 등을 늘 따오셨고 나도 할머니를 따라가 곧잘 바구니를 가득 채우곤 한다. 물론 지금은 불법이다.

그렇게 따 온 해산물들을 깨끗이 씻어서 뽀얀 국물을 내도록 쪄내서 실컷도 먹었다. 최고의 메뉴는 뭐니 뭐니 해도 해산물을 넣고 끓인 라면.


바다인데도 어디서 이렇게 모기가 날아드는지, 밤마다 모기들 때문에 매운 연기를 일부러 내기도 한다. 마른풀들을 태우면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데 모기가 쫒아지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확실히 내 눈은 맵다.

그렇게 지핀  불은 그냥 꺼지는 법이 없고 모닥불이 되어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잠들려고 누운 텐트 안에는 멀리 들리는 파도소리, 어디서 우는지 풀벌레 소리와 더불어 텐트 테이블에 둘러앉아 어제 했던 말 또 하는 듯 한 아빠와 어른들의 말소리가 우리 텐트안으로 자장가처럼 들리어오곤 했다. 아마 아빠의 하이라이트 시간이겠지.  이때를 위해 맥주가 궤짝으로 쌓였을 테니.  


맥주 타임이 아빠의 시간이라면 해수욕 타임은 우리의 시간이다. 그러나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누군가 대형  튜브를 들고 바다에 가면 따라 들어가 튜브 바깥에서 두 팔로 튜브 한쪽을 감싸고는 힘껏 매달려 소심하게 그냥 파도에 둥둥 떠있는다. 겁이 많아 혼자는 물속에 들어가지 못해서. 그러고도 너무 재밌어서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언니나 동생이 놀아주지 않아도 사실 물을 너무 좋아하던 나는 혼자서도 아주 소심하게 잘 놀곤했다. 몸에 꽉 끼는 작은 튜브를 허리춤에 끼워놓고 무릎 높이 정도 되는 물가에 엉덩이를 대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파도가 힘이 있다 보니 이리저리 몸이 흔들려 나름 재밌었다. 그러나 다섯 살, 여섯 살 애기들 틈에 그러고 앉아 노는 나를 보며 우리 언니는 눈으로 말했다.

'저걸 어쩌나...'

어쩌긴. 귀엽지 뭐.  


하지만 정말 귀여운 건 따로 있다. 노란 꽃이 온 천지로 덕지덕지 붙은, 턱에 끈을 묶는 형태의 샛노란 수영모. 해수욕장에서 수영모가 웬 말이냐. 언니는 바다에서 누가 수영모를 쓰냐며 비웃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수영모를 이곳 아니면 뽐 낼 수가 없기에 나는 기분을 좀 내려한다. 그리고 노란색 수영모와 세트인 노란색 홀터넥 원피스 수영복. 마음에 쏙 든다. 나는 세트가 좋더라.

신나게 갈아입는데, 아니 얘가 언제 이렇게 작아졌지? 꽉 끼고 길이도 짧아졌다. 키가 쑥쑥 클 때였던 것이다. 이거 말곤 수영복이 없으니 일단 입어야지 뭐 어째. 다행히 홀터넥이라 끈을 조절하면 된다. 내려 입은 수영복이 얼마나 아슬한지 그때는 몰랐다.    


해변의 텐트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정말 이상적이다. 민박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부스스하게 눈을 떠서 지익 지퍼를 열면 펼쳐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이라니. 그리고 허리를 숙인 채 무언가를 담고 있는 사람들. 뭐지? 달려가 보니 멸치 떼가 어디서 이렇게 몰려왔는지 얕은 물에서 팔딱거리고 있다. 파도가 쓸고 간 모래 위에서 반짝이는 은빛 멸치라니. 신이 내린 선물인가?

소쿠리를 들고뛰어야 한다. 그렇게 어느 아침, 일찍 일어난 아주머니, 아저씨, 아이들은 원시 수렵 체험을 했다. 사실 이곳이 멸치로 유명한 기장의 바닷가 중 한 곳이라 이런 신비한 체험도 가능했으리라.


지인들이 하나 둘 들릴 때마다 사다 주시는 간식이며 쥐어주시는 용돈도 좋았다. 집에서 500원짜리 동전 하나도 선뜻 쉽게 쥐어보지 못하던 우리인데 어른들은 이곳에만 오시면 거금을 쥐어주시는 것이다. 냉큼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로 뛰어가 원래보다 비싸게 파는 과자 박스를 오랜 심사숙고 끝에 조심스레 선택하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뛰어 돌아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랜 바닷가 생활로 반 거지가 되어있던 우리가 불상해서 쥐어주신 돈이었는지도. 얼굴은 타서 까맣고 습한 바닷바람에 머리는 떡지거나 부스스하고 몇 벌 없는 옷으로 돌려 입느라 차림새도 평소보다 배는 더 후줄근했으리라. 아무렴 어때. 초코파이며 오예스, 몽쉘통통 같은 넘사벽 과자들을 박스채 껴안을 수 있는 이 호사스러움을 가졌는데. 게다가 손님이 오시는 날은 김치밖에 없는 아이스박스에 수박이 채워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빠를 따라 바다로 가지 않았다. 한 밤 중 텐트 안까지 새어 들던 비와 간간이 날아갈 듯 불어대곤 하던 태풍같은 바람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마르지 않은 옷을 또 입는 것도 싫었다. 씻을 물이 부족해 안 그래도 곱슬이라 부스스한 머리가 더 원시인처럼 부스스해 다니는 것도, 거미줄이 여기저기 쳐진 공용 화장실도 힘들었다. 할머니가 코펠 냄비에 버너 불로 밥을 하시느라 바닷바람을 막아가며 불을 사수하려 애쓰시는 모습도 너무 안쓰러웠다. 매일같이 먹던 담치탕(홍합탕)도 이젠 지겨웠다.

개학 날, 수영모 존을 남기고 선탠 된 얼굴로 등교하는 것도 부끄러웠고, 어깨 여기저기 살 껍질이 산발적으로 까지는 것도 징그러웠다.  빨랫줄에 널어말리던 빨래도 부끄러웠다. 끝도 없이 밤마다 물리는 모기도 싫었다. 바다에서의 생 야생 서바이벌 캠핑보다는 집에서 티브이나 보는 희희낙락한 안락을 원하는, 5학년 고참초딩이 된 것이다.


6학년이 되었고 올해는 절대 아빠를 따라 바다로 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투덜이 스머프였던 나는 결의에 찬 다짐을 언니와 남동생에게 선포하며 그들을 선동했다. 며칠 후, 우리의 예상대로 아빠는 변함없이 바다를 떠날 채비를 하시더니 언제나처럼 툭 말씀하셨다.

"가자."

선동은 했지만 감히 안 가겠다는 말은 아빠 앞에서 못 하는 나를 대신해 할머니가 전해주셨다.

"야들이 올해는 안 간단다. 집에 있는다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빠는 혼자 떠나셨다. 바닷가 가자는 말, 다시는 하지 말라는 말을 버럭 남기시며. 무슨 성질이 저러신지, 역시 아빠는 제 멋대로다. 혼자 떠나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그때는 마음 깊이 안도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여름이면 늘 떠나던 아빠의 긴 여름바다 캠핑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 이듬해도, 그 이듬해도. 간간이 낚시를 즐기시러 여전히 텐트를 챙겨 들고 가시긴 했지만, 파라솔 테이블도, 대형 텐트 가방도 창고 구석에서 시간이 멈춘 듯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고 그렇게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커다란 가족앨범 속에는 작아진 수영복에 꽃 달린 수영모를 쓴 어린아이만 바다에서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그 날 아빠는 왜 그렇게 화를 내셨을까. 왜 우리가 안 가는 것이 아빠에게 홀가분한 일이 아니라 그렇게 화를 내실 일이었던 걸까. 평소에 우리랑 같이 잘 놀지도 않으셨을뿐더러, 바다에 가서도 아빠는 수영을 가르쳐 주신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신다거나 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내 눈에는 맨날 다른 어른들이랑 술만 드시거나 따로 낚시를 가시거나 먼바다로 나가 혼자 수영하고 오시던 아빠였는데. 우리가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듯한 아빠였는데.

귓가에 "다시는 해수욕 가자는 말 하지 마!"하고 버럭 내지르던 말이 한동안 맴돌았다. 지금 내 나이가 그 시절 아빠의 나이대로 접어드는 초입이라 안 보이던 것이 보이려고 한다. 행여 그때 버럭 내지르던 한 마디는 "너희 때문에 아빠는 일부러 여름마다 해수욕 간 건데"라는 말이었을까, 나는 사실 두렵다.

함께 하던 여름 캠핑은 사실, 일이 일정치 않으셨던 아빠가 어린 자녀들을 위해 어렵게 잡혔을 일도 일부러 조정해가시며 마련한 자리였을까 봐. 바다가자는 말이 '다른 건 아빠가 못 해줘도 여름 방학에 작은 추억은 꼭 만들게 해줄게'하는 뜻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식 사랑 표현이었을까 봐, 나는 사실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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