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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Jun 11. 2020

바깥 바람이 이렇게 예쁠 일인가요

   

 토요일 오후 2시.

 한 손에는 음료수, 다른 한 손에는 책을 한 권씩 들고 우리 셋은 나란히 공원으로 걸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잔디 언덕 위에 고풍 있게 자리한 한옥 정자. 돌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올라가니 꽤 너른 대청마루 바닥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하늘은 맑았고 태양은 뜨거웠지만 정자 안은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주고 있었다. 맨발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발바닥에 닿는 대청마루의 매끈매끈한 나뭇결이 시원스레 와 닿는다. 맨발의 못난 발가락이 부끄럽지 않았다. 원래 대청마루의 맛은 맨발로 느껴야 진국이니까.

 

 마루에는 이미 먼저 와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단란한 가족 한 팀이  있었다. 헬멧을 벗어놓은 걸 보니 라이딩을 나온 듯하다. 조용한 식사를 마친 그들은 지체 없이 자리를 떠났다. 비로소 공간은 온전한 '우리 것'이 되었다. 이 시간을 사실 기다렸다.


겨우 아니, 셋 씩이나 모인 모임이었기에 짧게 모임 순서를 설명했다.  

 "우린 책을 미리 읽어오는 그런 모임은 아니니까 굳이 그런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와서 이 시간 같이 책 읽으면 돼요. 각자 준비해온 책을 자유롭게 1시간가량 읽을게요. 그 후에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하고 마무리할 거예요. 중간중간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이 있을 텐데 자유롭게 필사하고 마무리할 때 읽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좋아요!"


그리고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나는 이 시간을 기다려 일주일 내내 준비한다.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읽을까. 어디에서 읽을까. 몇 시가 좋을까. 독서하면서 먹을 간식은 뭐가 좋을까...

 갈수록 이 시간이 편해지고 좋아진다. 함께 책을 읽기 위해 준비하는 모든 시간이 좋다.

늘 생각하는 건 다 하나.

'내가 느끼는 걸 이들도 느낄 수 있을까.'


코로나 사태로 4개월 만에 다시 시작한 모임이었다.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조용히 묵상하고 조용히 기록하며  조용히 음미했더랬다. 그러다 책 속 공감의 문장도, 깊이 몰입하는 시간의 공기도 너무 좋아 이 좋은 걸 혼자만 좋아하는 게 너무 아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독서모임을 어서 다시 할 수 있기를 꿈꿨다. 그리고 좋은 걸 알면서도 자꾸 랜선 속 망상 라이프와 곧잘 바꿔먹는 나를 건져내 줄 강제성도 필요했다. 역시나 '모임'이 필요했다. 열띤 토론러들의 뜨거운 시간이 아닌, 그저 개인주의적 독서를 지향하는 지극히 사적인 독서 모임 말이다. (대부분의 독서모임은 토론식이라서)


 늘 실내에서만 독서모임을 진행하던 나는 사실 자연 속 독서에 괜한 로망도 있었다. 파도소리 잔잔한 해변에서 , 한적한 숲 속 캠핑장에서 , 조용한 정원에서 자유롭게 눕고 기대고 앉아서 책을 읽는 장면은 그 모습 그대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풍경 아닌가. 장소를 처음 발견한 올초 겨울, 나는 이곳을 그런 로망을 작게나마 실현시켜 독서 장소로 점찍어두고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더랬다.

 그런 탓에 야외에서, 그것도 여러 명이 함께 하는 것에 이래저래 혼자 괜히 설레고 기대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기분 좋게 부는 바람 탓인지 정자 안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워서 독서하는 내내 행복했다.


 어느덧 한 시간이 끝나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한 입씩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취준생인 K가 말했다.  

"안 쓰면 읽고 나서 다 잊어버리는데 이렇게 기록하면서 읽으니까 좋은 거 같아요. 저는 지금 읽는 책이 좀 어렵기는 한데 계속 '왜?'라는 질문을 하게 해주는 내용이 많았어요. 그래서 평소 생각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녀가 읽는 책은 베스트셀러인 [미움받을 용기]였다. 3주째 읽고 있는 그녀의 책은 얼핏 보기에도 여기저기 포스트잇이 꽤나 붙어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후 P가 말했다.

"저도 그 책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사실 지금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그 당시에 굉장히 위로받았던 기억만 남아있어요."

그리고 그 책을 읽지 않은 나는 둘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그럼 읽어볼.... 아니다. 난 이미 미움받을 용기는 다 갖추었잖아?'

나는 은근히 튀려고 하는 욕구가 있는지 남들 다 하는 건 안 하고 남들 안 하는 건 하겠단다. 이번 생엔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저는 지금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제가 요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걸 도전하고 있고 올해 책을 많이 읽겠다고 도전하고 있는데 자꾸 실패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너무 도움되는 내용들이 많아서 다시 도전해보려고요."

오늘 처음으로 모임에 온 P가 말했다. 자기 계발 욕구가 충만한 젊은 직장인다웠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은 꼭 나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의 이야기다. [대기업 때려치우고 동네 북카페 차렸습니다]. 직설적인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그랬다. 오늘도 혼자 책방 창업 앓이 중이다. 머릿속 생각을 실천에 옮기신 이 분의 용기에, 계획에, 체력에 박수를.


 모임이 마무리된 후에도 우린 그곳을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다들 코로나로 꼭꼭 숨어있다가 오랜만에 야외에서 가진 이런 시간이 너무 좋아서. 스마트한 세상을 잠시 내려놓고 함께 아날로그 한 책을 읽으며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재밌어서. 그리고 정자 안으로 모임 내내 솔솔 불어오던 바람이 너무 예뻐서.


늘 꿈꾸던 장면이지만 오늘 더더욱 다짐했다. 꼭 야외 공간을 품은 책방을 가지겠다고. 옥상이든 마당이든 5월의 이 바람을 매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꼭 마련해서 그곳에서 독서에 빠져들게 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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