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필요가 우리의 생각을 정한다
경제학자 같은 역사학자 이언 모리스의 2015년작. 문명사를 해석하는 빅히스토리 계열인데 '총균쇠'나 '사피엔스'에 비해 잘 읽히지는 않는다. 가치관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일단 저자는 가치관의 범위를 '정치적, 경제적, 성별 위계(수직적 불평등)와 폭력에 대한 태도'로 제한한다. (25페이지) 그리고 인류사의 발전 과정을 에너지(칼로리) 획득 방식에 따라 수렵채집, 농경, 화석연료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별 에너지 획득량의 증가와 함께 가치관도 변해왔다고 주장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정치적으로는 관료 시스템이 등장할 만큼의 사회 규모를 이루지 못해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해서) 평등했을테고, 경제적으로는 잦은 이동이 필요한 생활 방식 때문에 사유보다는 공유가 효율적이었을테고.
(비축이 어려우니) 오늘의 풍요를 남과 나누고, 내 호의를 받은 사람이 내게 보답할 것을 기대하는 편이 낫다 (71페이지)
성차별이 없진 않았지만 (혈족에게 남겨줄 재산을 모으기 힘든) 희박한 사유 개념이 혈통에 대한 강박과 함께 여성을 억압하려는 경향을 줄였으며, 이는 농경 사회에 비해 느슨한 성차별로 이어졌다
폭력에 관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폭력을 독점하고 대리해줄 계층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적 평등은 구성원간 갈등이 발생했을 때 가장 쉬운 해결책으로 자력구제를 선택하는 배경이 되지 않을까? 하물며 물리력 의존도가 높은 수렵채집 사회 아닌가.
수렵채집 사회에서 폭력적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10%도 넘었다. 이에 비해 농경 사회는 5% 정도 (139페이지)
사회 규모가 커지면서 등장한 엘리트 정치 집단은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통치 체제를 만들었다. 폭력을 통한 정치적 위계 등장.
엘리트층은 덩어리가 커진 사회의 면면을 조직하고 재편해 나가며 세금 부과, 법 집행, 종교의식 주관, 정복전쟁 수행, 반란 진압 등의 통치 활동을 했다 (108페이지)
농업을 위한 정착 생활을 통해 사유재산 개념이 뚜렷해졌고, 인구가 증가할수록 생산 수단인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경제적 위계도 등장. 이후 생산성을 높이려는 다양한 사회 변화(노동 분업과 노동 시장 출현 등)가 나타났고, 특히 잉여 에너지의 최대 수혜자인 엘리트층이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장려한 강제 노동에 의해 경제적 위계의 격차가 점점 더 커져갔다.
사회는 고용주 입장에서 긍정적 한계생산물이 발생하는 선까지 노동비용을 낮추기 위해 폭력을 동원했고, 그 결과 실패한 노동 시장을 노예제가 대신하게 되었다 (106페이지)
제국이 등장할만큼 커진 사회 규모와 함께 정치/경제적 위계의 격차 역시 심각해졌으나, 사회의 분위기는 대체로 그 격차를 용인했다.
로마의 지배층은 나머지 로마 민중에게서 거의 80퍼센트의 부를 '추출 '했다 (97페이지)
지배층이 종교 등의 기축사상을 지배 이념으로 활용하면서 정치/경제적 위계를 정당화(왕권신수설, 신분제 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 숭배를 죄악시하는 풍조(부자는 천국 가기 힘들다?)를 조성해서 민중을 달랜 결과. 그래도 안 통하면 법을 앞세운 폭력의 철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후 로마 제국의 초부유층이 교회 위계의 상층부를 완벽히 장악했다 (129페이지)
결정적으로 농경 사회가 국가의 폭력을 인정하고, 위계를 묵묵히 받아들인 이유는 지배층이 통치 체제와 농업 생산을 방해하는 모든 폭력을 폭력으로 잠재운 결과, 먹고 사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기 때문.
농경민은 엄중히 계층화되고 정도껏 평화가 유지되는 세상에서만 존속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위계와 평화에 가치를 두게 되었다 (143페이지)
효율적 국가 운영의 기반이 된 정치/경제적 위계는 남녀가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에도 영향을 주었다. 분명 안정감을 주는 측면이 있는 수직적 위계가 가부장제라는 이름으로 가족 단위에도 적용된 것. 특히 재산 형성과 대물림이 가능해지면서 혈통에 대한 집착이 커졌고, 노동력 확보를 위한 육아의 중요성 역시 커지면서 사회 활동 제약 등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강화됐다.
산업혁명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를 열었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소득/인식 수준을 높였으며, 이는 사회 구조의 대변혁으로 이어졌다.
생산성이 하늘을 찌르자 비로소 고용주들이 수익의 일부를 노동자들과 나누는 것이 파업을 막는 것보다 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156페이지)
임금노동이 매력적인 대안이 되자 자유노동자가 수백만 명씩 노동시장에 유입됐고... 노예는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제조품을 살 여력이 없었고, 기업가들은 강제 노동을 점차 이익 추구와 성장의 걸림돌로 인식하기 시작... 정치 세력은 기존 입장을 180도 바꿔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고 나섰다 (157페이지)
세계적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선 것을 포함, 대부분의 사회 제도가 이 시기에 바뀌거나 새로 만들어졌으며, 산업혁명 이전 5, 6억이었던 세계 인구가 70억 이상 급팽창하는 인류 최대 번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그 70억이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인권이 신장되었고, 페미니즘/PC(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 확산될만큼 성별 포함, 거의 모든 불평등을 지양하려는 문화로 확대됐으며, 그만큼 위계는 부정당했다. 그러나 그 부정은 좀 애매했다.
수직적 위계와 수평적 위계 사이의 줄타기는 화석연료 시대 정치의 특징이다. 이런 타협은 경제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화석연료 사회는 일정 수준의 계층화를 요한다... 유효 수요를 창출할 구매력 있는 중산층, 노동자 계급과 경영능력을 제공하고 물질적 보상을 기대하는 역동적 자본가 계급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185페이지)
농경 사회가 평화를 이유로 위계를 용인했다면, 화석연료 사회는 성장과 풍요를 이유로, 특히 경제적 위계를 용인했다. 반면 대의 민주주의 발전으로 정치적 위계는 상대적으로 그 격차가 줄어들었다.
정치가는 자본가의 보디가드 - 싸가지 없는 진보 (207 페이지)
폭력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이익 추구와 성장의 걸림돌로 인식되는 전쟁 등의 폭력 역시 대체로 부정당했다. 최소한 세계대전급의 폭력은 앞으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유사 이래 인류가 가장 평화로운 이유의 반은 자본가의 활약.
이 책은 특이하게 저자의 주장에 대한 세 명의 학자와 문학가 한 명의 논평을 담고 있다.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저자의 주장이 지배 계급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지적과,
이언은 경쟁, 정량화 가능성, 사회적 합의, 효율을 중시한다. 공교롭게도 네 가지 모두 자본주의 활동과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 이념이다 (255페이지)
복잡다단한 인류 문명사를 너무 단순/일반화시켰다는 지적.
모리스의 놀라운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그림과 서술들 틈에서 공백을 느낀다. 아마도 '데이터 젠트리피케이션 '이라는 일종의 간소화 현상 때문일 것이다 (262페이지)
타당한 지적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싶다. 수직적 계층화가 인구 증가와 조직 효율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은 역사가 보여줬고, 수십만 년 역사를 거시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이 책 요약에도 후달리는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역사를 이해하나(..)
보편적인 역사는 우연히 에너지 획득량 증가를 맛 본 후, 그 에너지의 획득 방식을 수용한 사회가 번성하는 과정의 반복이고, 가치관은 에너지 획득 효율을 높이는 데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결국
시대의 필요가 우리의 생각을 정한다
참 잘 만들어진 카피이긴 한데, 시대의 필요가 우리의 사고를 대신한다는 결론은 좀 굴욕스럽기도 하고, '최소비용 최대효과'란 경제 원칙을 이렇게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한편으론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만 집중하면 되니, 세상이 좀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고?
기억에 남는 문구를 남긴다.
에너지 획득 방식이 가치관을 결정한다는 내 이론이 옳다면 그것은 첫째, 절대보편의 완벽한 인간 가치 체계를 주장하는 도적철학 이론은 모두 시간 낭비라는 뜻이고 둘째, 우리가 오늘날 금과옥조로 받드는 가치관도 머지않은 미래에 골동품이나 폐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 머지않은 미래가 오면 우리는 지금의 가치관을 버리고 제4단계 가치관, 포스트-화석연료 가치관으로 옮겨 가게 된다 (26페이지)
오늘 우리가 그렇게 떠받들던 가치관이 내일 당장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도 있다면,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