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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정 Jul 17. 2024

청소하기, 빨래하기..

기억력이 안 좋은 사람

수년 전, 나에게 물건을 판매해 줬던 사람의 얼굴은 기가 막히게 기억해서 부끄러운 경험을 몇 번이고 만들면서 일상의 것들은 잘 잊는 이상한 기억력을 지녔다.

그래서, 부모님 품을 떠났을 때부터 집에는 늘 화이트보드가 있었고 항상 시답잖은 일상의 일이나 매일 반복해야 하는 어쩌면 당연한 일들을 적어놓곤 했다. 그런데 몹시 잘 사용한 것처럼 적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그간 나의 화이트보드는 잘 쓰이지 않았다. 지금껏 혼자였던 순간이 없었고 나의 덜렁거림을 챙겨주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혼자가 되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게 뭘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 어렵고 힘든 탓에 또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는 미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정신 붙잡고 제일 먼저 산 게 바로 화이트보드였다. (물론 다양한 이별들에게도 예의가 아닌 듯싶었고 말이다)
'뭐부터 적어야 하지'하며 무려 고민까지 해서, 적었던 첫 내용은 [청소하기]였다. 그다음은 [빨래하기] 그다음 줄엔 [설거지하기] 이런 것들이었다.

일상의 당연했던 것들이 무너진다는 건 굉장히 큰 일이다. 폐허가 된 공간에서 풀풀 날리는 먼지와 함께 그냥 그렇게 말라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렇지만 재밌게도 그 시기가 지나 창문 새로 햇빛이 들어와 다 무너졌기에 날리는 먼지가 보일 때,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도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2주 전에 적어놓았던 청소하기, 빨래하기, 설거지하기, 햇반 정리하기, 캐리어 정리하기를 지우고 싶었고 오늘에서야 적어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지우며 집안일을 했다. 이게 뭐라고, 간단해 보이는 것들이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그렇다고 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그런데 다시 정렬을 맞추니, 채울 것들이 눈에 보였다.

이사를 한 지, 2주가 다 되어가는데 냉장고 안에는 물밖에 없었다. 그래서 달달달달 소리를 내는 폴딩 카트를 끌고 마트로 향해 비워진 냉장고를 하나씩 채웠고 건조기 안에 넣어놓고 대강 쓰던 수건들도 있어야 하는 자리에 채워 넣었다.

다 해내고 텅 빈 화이트보드를 보며 인생은 어쩌면 부서진 서랍장을 다루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부서졌기에 다시 세워야 하는 것이 보이고, 다시 세워 보니 이젠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 보인다.

워낙 맥시멀 라이프인 나는, 여전히 채워야 할 것이 한가득이지만 더 큰 서랍장을 들이는 여유부터 찾는 것이 먼저이겠지. 그래서 오늘도 더 큰 서랍장을 들이기 위해 화이트보드에 시답잖은 일상을 적고선 이상한 기억력에 감사하는, 그냥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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