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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선 Dec 24. 2020

영화_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삶의 굴곡에서 와인을

남편은 나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심각해지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와인은 내가 가장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 이라는 말에 뒤이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와인 셀러를 오랜 검색, 고민끝에 집에 들이고, 함께 좋은 와인을 고르는 것에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그도 분명 와인을 좋아하는게 틀림없다.  물론 내가 조금 심각하게 굴긴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와인의 색, 향과 맛은 오감을 자극하고 알콜은 기분을 낫게 해주며 포도품종과 재배 지역 그리고 발효, 숙성방법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와인들은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와인은 거의 항상 맛있는 음식을 동반한다. 잘구운 소고기를 적당히 잘라 입안에 넣고 몇번 씹은 후 풀바디 레드와인을 마시면 입안이 풍미로 터진다. 상큼하고 가벼운 쇼비뇽블랑 한잔에 콤콤한 치즈를 곁들이면 행복이 바로 내곁에 와있다. 가볍고 우아한 피노누아는? 미네랄 향이 가득한 샤도네이는?
아.... 이런 이야기는 몇시간이라도 할 수 있다.


영화 ‘사이드웨이’의 주인공, 마일스는 나보다 더한 와인 애호가이다.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로 여행을 수시로 다녀 그 지역에 단골식당이 있을 정도이고 와인에 대해 툭치면 줄줄이 쏟아 낼 정도로 지식과 애정이 깊다. 시음할 때 잔에 코를 박고 어떤, 어떤 향이 나는지 말하는 걸 보면 전문가 못지않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인생의 어려움에 봉착한 상태. 탈고한 소설의 출판이 번번히 퇴짜를 맞았고 이번에 새로 쓴 소설 또한 출판이 가능할지 불투명하다. 2년전 이혼했지만 전처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새로운 사랑은 여전히 요원하다. 나이는 잔뜩 먹었는데 어느 것하나 제대로 이뤄놓은게 없다는 생각은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영화는 마일스가 친구인 잭과 둘이서 일주일 뒤에 있을 잭의 결혼을 기념해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로 (총각)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잭에게 마일스의 와인과 같은 존재는 바로 여자(혹은 성욕). 그에게 이 여자 이래서, 저 여자는 저래서 모두가 매력있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결혼 전 마지막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그는 몹시 들떠있고 마일스에게도 동참할 것을 강요한다. 그는 그런 잭이 못마땅하지만 단골 레스토랑의 직원인 마야와 재회하면서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조심스레 생각하게 된다. 잭 역시 한 와이너리에서 한눈에 통하는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넷이 함께하는 저녁을 제안한다.

영화는 로드무비의 형태를 띄고 있다. 남자 둘이 떠나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소동같이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이드웨이는 그 과정을 억지스럽지 않고 덤덤하게 그려내 심각한 상황이지만 피식 웃게되는 연출이 돋보인다.
와인을 다뤘다해서 골랐던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도 훌륭했다. 와인에 대한 대사들, 책에서나 봤던 와이너리의 풍경들 그리고 와이너리로의 여행.... 마야와 마일스가 진지하게 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참지 못하고 어제 남은 와인을 잔에 따랐다. 나도 거기 앉아 대화에 동참하고 싶었다.  
밭에서 포도가 자라고 그걸 하나하나 재배해 발효, 숙성하여 한병의 와인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고 자연과 기후와 토양이 도와주어야 하는지, 마일스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야는 오래된 와인의 빈티지를 보며 그 사이 사라져갔을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와인을 오픈하는 정점의 시기와 와인의 쇠락에 대해, 잔에 따른 후에도 끊임없이 변해가는 와인의 맛까지. 영화는 와인과 인생이 닮았음을 어렵지 않게 보여준다.
특히 마일스는 피노누아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피노누아란 품종은 재배가 어렵다. 껍질이 얇고 병충해에 취약해 더 많은 정성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재배된 포도로 최상급의 맛을 가진 와인을 만들 수 있다. 마일스는 피노에 자신을 투영했는지 모른다. 나약하고 까다롭지만 그래도 정성을 들이고 노력하면 최고의 글을 쓸 수 있다고. 하지만 난해한 그의 소설은 결국 출판을 거절당하고 마음을 열었던 마야와의 관계도 주말에 있을 잭의 결혼을 숨겼다는 이유로 끝나고 만다.
마일스는 잭의 결혼식에서 전처와 마주친다. 얼마전 재혼했다는 그녀는 임신소식을 알리며 다시한번 마일스를 절망에 빠뜨린다.
그는 그대로 집으로 달려가 특별한 날을 위해 아꼈던 61년산 슈냉블랑을 가지고 싸구려 햄버거 가게로 간다. 일회용 컵에 그 귀한 와인을 몰래 따라 마시며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는다. 마침내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번진다.
마야가 말했다. 특별한 순간 그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그 와인을 마시면 그  순간이 특별해지는 것이라고.


일상으로 돌아온 마일스는 일과 사랑 모두 놓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생에 완전한 실패와 성공이 있던가. 시간은 흘러갈 뿐이고 거기에 무수한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마일스 역시 자신의 인생이 진창에 빠져있다고 느끼지만 슈냉블랑 한잔으로 다시 나아간다.

깊은 패배감이 우리 인생을 범람할 때, 그대로 주저 앉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때, 툭툭 털고 일어나 우리를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건, 원대한 꿈이나 야망이 아니다.
그저 맛있는 와인 한잔, 사랑과 격려를 담은 짧은 전화 메세지 한통. 그리고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솔직한 움직임. 그것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크고 넓은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 ‘사이드웨이’, 우리에겐 소소한 곁길이 필요하다.

내가 마일스처럼 레드에선 피노누아를 선호하는 이유와 그 괘를 같이하는 지도 모르겠다.  피노누아는 보통 바디가 가볍다. 그래서 잘만든 피노누아는 섬세하고 우아하다. 나는 그동안 너무 큰꿈을 쫒으며 살아왔다. 와인은 무겁고 진한 것이 좋았다. 내 일에서 성공하는게 진짜 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너무 먼곳을 바라보다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큰꿈은 일상을 눌러버린다.
하지만 내일을 담보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제대로 살아보자 마음 먹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기위해 더 가벼워져야 했다. 마음을 비우고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지금에 충실할 수 있다. 나에게는 그게 피노나 화이트와인으로 상징된다.  
....... 아니다. 좋아하는 것에 너무 의미를 담아 심각해지지 말아야 겠다.

마일스가 61년산 슈냉블랑을 햄버거와 마시며 느꼈던 것은 아마도 해방감이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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