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미선 Jan 11. 2021

영화_이제 그만 끝낼까 해

나는 또 방향을 잃었다.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했던 것일까
내가 봤었던 가장 난해한 영화 독보적인 1위, ‘시네도키,뉴욕’ 찰리 카프먼 감독의 작품이었다. 플레이 전 망설었지만 그 이후 조금이라도 이해의 폭이 넓어지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는 이래도 괜찮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 (적어도 내겐) 친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스로 발전한 것이 있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보는 게 더이상 거북하지 않다는 것. 그 사이에서 재미를 찾을 줄 안다. 인상깊은 대사를 끌어 올리고, 떠오르는 표정에서 인물의 감정에 주목한다. 하지만 영화가 어떻게 전개되는 것인지는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대충 그런가보다 이해해보려고 했건만 하얀 눈밭, 눈으로 뒤덮힌 자동차의 실루엣 위로 떠오르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뭔가를 크게 놓쳤음을 알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쉬 내려놓지 못하고 머리속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제이크, 학교의 관리인 할아버지가 제이크인 것은 알겠다. 이 영화는 제이크의 상상 혹은 망상에서 시작되었는데 영화 내내 관객의 진입로가 되어주었던 여주인공, 루시 혹은 다양한 이름과 직업을 가진 그녀는 제이크의 상상 속 허구의 인물이다. 아마도 이 지점이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주된 이유이지 않을까. 나레이션을 읊는 여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영화를 보고있는데 사실 이 모든 감정이 제이크의 것이라는.
그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말과 행동보다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은 생각이라고, 제이크는 여주인공을 통해 영화 초반에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이자 그의 상상, 여자친구를 부모에게 소개시키는 ‘사건’은 제이크에게 복합적이면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의 그는 나이가 꽤 들었지만 여전히 후회와 가정이 가득찬 젊은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자친구를 부모에게 소개시켜주는 장면을 되돌리고 되돌린다. 그 장면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한번 보게되지만 영화속 몇가지 단서로 이 상황을 제이크가 머리속에서 얼마나 많이 재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자친구의 이름은 계속 바뀌고 그녀가 하는 일 또한 수시로 변한다. 그의 부모도 나이가 들었다가 젊었다가 죽었다가, 시간은 그 상황을 관통한다. 잠시 들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점원이 하는 말, 그 아이스크림을 버리러 간 학교 쓰레기통에 가득찬 똑같은 컵들.
제이크는 그 가정을 반복하면서 후회와 슬픔으로 현실을 잠식당했을 것이다. 다들 한번쯤 인생에서의 가정과 후회를 한다.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지금 내인생이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보통 거기에 잠식당하지는 않는다.

다시 제이크의 상상속으로 들어가보자.
광견병 바이러스에 대한 논문을 쓰던 여자친구는 자기가 쓴 시를 낭송하고 이후 화가가 되었다가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노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된다. 옷차림이나 말투도 미묘하게 계속 바뀐다. 이 모든 내용은 아마 그의 욕구를 대변하는 것일테다. 한때 관심있었거나 잘하고 싶었던 분야의 일들. 그녀는 제이크의 또 다른 버전이다. 그에게 멸시의 눈길을 보냈을 금발의 비정한 미녀들과 질적으로 다른, 똑똑하며 당당하며 인간적이며 따뜻하다. 그의 집으로 온 그녀는 그제서야 제이크에 대해 알아간다. 어릴 적 어떠했는지 성격은 어떠한지, 어릴 적 쓰던 방과 지하실에 감춰뒀던 그의 욕망과 실제 현실까지.
그의 부모는 이상하다기보다 기괴한 쪽에 가깝다. 젊은 시절, 나이가 들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 그리고 죽는 장면까지 부모를 떠나 살던 상상과 달리 제이크는 쭉 그들과 살았던 것 같다. 어릴 적 학교를 나온 동네에서 부모와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도 그 집에 혼자 지내던 제이크.  

제이크는 미뤄 짐작해보건데, 부모와도 문제가 있었고 성실한 성격이지만 소심하고 좋아하는 일에 뛰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여자와의 대화에도 서툴어 제대로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어보인다. 계속되는 좌절과 자신에 대한 실망, 타인에게 지지를 받은 경험의 부재.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아왔고 떨쳐낼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이 가정과 상상, 망상에 더욱 집착하게 만든지도 모르겠다. 현실세계에는 그를 붙들어 줄, 온기가 없다. 반복되는 그의 상상으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그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


하루의 노동을 끝낸 현실의 제이크는 집으로 가지 못한다. 집으로 가는 것은 끔찍하다. 개가 핧아주든 아니든, 아내가 있든 아내의 형상을 한 외로움이 있든. 고된 노동의 낮이 그리워질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결국 제이크는 외로움에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을 상상 속 연인들을 쓸어내고 이 모든 것을 끝내기로 한다. 삶을 끝내려고 하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이스크림 가게의 광고 애니메이션. 그저 CM송일 뿐이지만 언제든 놀러오라는 자본주의의 따뜻함이라도 그에게는 간절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릴 적 집에서 길렀던, 배에 구더기가 가득한 채 죽은 돼지가 그를 부른다. 부모의 무관심으로 방치돼 죽었던 돼지, 제이크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그 돼지를 알몸으로 따라간다.
그의 마지막 상상은, 어떤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는 자신이다. 강단에 서서 그는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노라고. 객석에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잠시라도 그의 인생을 스쳐갔던 인물들. 그 사람들 앞에서 큰상을 받고 소감을 이야기하는 자리. 그는 이제 이 망상을 끝내고 이것이 모두 허깨비라는 것을 인식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캐치하지 못했던 이유중 하나가 분명해진다.
영화 초반, 여주인공이 [본도그]라는 시를 읊는다. 본인이 썼다고 하지만 실제 Eva H.D. 의 작품. 시는 너무나도 외로워서 낭송하는 사람까지 울게 만든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처절한 외로움.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들이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했을 때 철저히 혼자인 것 같은, 집에 돌아 오는게 끔찍할 정도로 외로운 시간이 나를 지나갔다.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따뜻해져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되었다. 밝고 따뜻한 곳. 거기 머문지 오래되어 차갑고 애리는 외로움에 둔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썼다 지웠다, 이 글을 일주일이 넘게 매일 써왔다. 그러면서 영화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내용이 해체되고 재조립되어 매일 새롭게 떠올랐다.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때, 그것을 글로 쓸 때, 내 마음이 한뻠 더 커지는 느낌이다.

영화의 내용이 내 안으로 들어오자 나의 현실에, 내 주위의 따뜻함에 새삼 감사해졌다.
긴 시간 이 영화를 붙들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만 끝내야할 것 같다.
뭐든, 끝은 있는 법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드라마_퀸스 갬빗 (The Queen’s Gambi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