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쟁이 끝난 후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마흔셋에 발표한 첫 소설 『파리 대왕』은 훗날 노벨문학상을 안겨주는 그의 대표작이 된다. 제목 ‘파리 대왕’은 성경에 나오는 우상 신을 뜻하는 말로 악을 나타낸다고 한다. ‘악’을 제목으로 내세운 골딩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그는 인류의 어두운 역사, 전쟁을 체험하면서 인간의 야만성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다. ‘악’이라는 이름의 인간의 어두운 면을.
어느 외딴섬에 영국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가 불시착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대여섯 살 꼬마부터 열두 살 소년들이 전부이다. 소년들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영국이라는 문명 세계에서 온 만큼 소년들은 규칙과 규율을 만들기로 한다. 금발 머리에 키 큰 소년 랠프는 소년들의 대장이 되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한다. 섬에서 구출되기 위한 봉화를 피워야 한다는 목표다.
랠프가 대장이 된 것은 ‘소라’ 덕분이었다. 랠프가 지닌 외양도 한몫했지만, 소라를 불면 소년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으므로 소라는 랠프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소라는 발언권을 의미했으며 발언을 하려면 소라를 들어야 한다는 규칙이 형성된다. 소라를 구한 것은 랠프가 아닌 ‘돼지’(피기)라고 불리는 소년이었다. 천식을 앓고 있어서 몸은 나약할지 모르나 생각하는 능력은 누구보다 강한 소년이다. 그토록 중요한 불을 피울 수 있는 것은 피기가 쓴 안경으로 가능하다. 유일하게 통찰력 있는 말을 하는 소년이지만, 소년의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어떤 소년도 피기의 이름을 묻지 않아서다.
피기는 소년들의 놀잇감이 되어 조롱당한다. 랠프는 피기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피기를 거리낌 없이 놀린다. 마치 사냥감으로 삼듯이 랠프는 피기를 비웃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소년들의 마음을 유도한다. 대장이라는 권력을 위해서는 희생제물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잭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고기가 필요하므로 멧돼지 사냥을 하겠다고 소년들을 선동한다. 소년들은 랠프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봉화를 피우거나 바닷가 오두막집을 짓는 것을 제쳐두고 잭의 멧돼지 사냥을 따라나선다. 그렇게 잭은 사냥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권력을 얻는다. 잭과 랠프가 갈등을 일으키면서 소년들은 분열되기 시작한다.
감시와 처벌이 부재할 때, 규범과 규칙은 쉽게 나약해진다. 멧돼지를 살상하며 피를 본 소년들은 더욱 흥분하여 춤추고 통제 불능이 된다. 손에 묻은 피로 얼굴을 색칠하고 변장하여,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책임을 벗어버리고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잭 일당들의 폭력성을 통제하기에는 랠프의 지도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은 야만성은 순식간에 광기로 폭주하고 진짜 짐승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지도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잭을 따르는 소년들이 이성적 판단에 따르기보다 즉흥적으로 잭의 선동에 휩쓸린다.
피기는 목소리 높여 묻는다. ‘규칙을 지키고 합심을 하는 것과 사냥이나 하고 살생을 하는 것- 어느 편이 더 좋겠어?’ (270쪽) 이미 광기에 매몰된 소년들은 피기의 질문을 듣고 생각하기 보다 돌을 던져 묵살한다. 야만이라는 어둠을 몰아내려면 이성이라는 빛이 충분히 강해야 하는데, 랠프와 피기로 대변되는 이성은 집단의 광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야만의 폭주는 비극을 낳고 마지막에 랠프가 흘리는 눈물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진짜 무서워할 것은 섬에 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한 짐승성, 다름 아닌 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