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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 기록 Dec 23. 2023

과거가 없는 남자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에서 본 핀란드의 설경을 기억한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에 자작나무가 일렬로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을. 입에서 입김이 나오고 몸이 움츠러들 만큼 추운데, 하얀 자작나무 숲은 이상하게 따뜻해 보였다. 마치 눈이라는 이름의 포근한 이불처럼.      


핀란드 대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를 보았다. 20년 전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그의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상영 중이기 때문.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애정하는 짐 자무쉬는 그의 영화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의 영화가 주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영화 속 웃긴 장면은 나를 슬프게 하고, 반대로 슬픈 장면은 나를 웃게 한다.”     


슬프면서 웃기고 웃기면서 슬픈 장면을 연출하는 감독의 솜씨를 경험하고 싶었다.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한밤중 벤치에서 여행용 트렁크에 기대어 졸고 있던 남자는 동네 건달들에게 둔기로 맞아 머리를 심하게 다친다. 기억을 잃는다. 자신의 이름도, 가족도, 집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백지상태가 된다. 과거를 잃어버려서 ‘과거가 없는 남자’가 된다.      


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병원을 나와 어느 소도시 바닷가에 시체처럼 누워있다. 그런 그를 어린아이들이 발견하여 부모에게 알린다. 허름한 집에 사는 부부는 남자를 간호하며 돌본다. 아무런 대가 없는 돌봄이 그를 살린다. 사람들은 남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가 살 곳(컨테이너)을 알아봐 준다. 서서히 몸을 회복한 남자는 일할 곳을 알아보러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지만 작성해야 하는 서류들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글씨 쓰는 법을 잊(잃)어버려서다.       




남자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딱히 불만을 품지 않은 표정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둔기로 맞았다고 하여,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화내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자신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묵묵히 받는다. 아이구, 뭘 이런 걸 다 주시고. 감사합니다. 은혜는 꼭 갚을게요. 이런 말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도움을 갚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구세군에서 제공하는 무료배급소에서 음식을 나눠주는 여자에게 첫눈에 반한다. 말수가 적은 무뚝뚝한 남자가 여자 앞에서 말이 많아진다. ‘이름이 뭐예요?’ 묻지만 여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남자는 다시 구세군을 방문하여 여자를 만난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부랑자 행색의 남자를 여자는 딱하게 여겨 입을 것을 내어주고 구세군에서 일하도록 도와준다. 여자는 비로소 남자에게 묻는다. 무슨 일을 당한 거예요? 이름을 말해주기 전까지 말 안 합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익명의 존재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남자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 밤길에 여자를 데려다주고 여자를 자신의 컨테이너로 초대하고 요리를 한다. 요리하는 남자가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여자가 묻는다. 도와줄까요? 남자는 아무렇지 않듯이 이렇게 말한다. ‘이미 망쳤는걸요’ 


     

퉁명스럽고 투박한 영화에서 무심하게 터지는 유머. 차가운 영화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잃어버린 기억의 보상처럼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지만, 어이없게 은행 강도 사건에 연루되어 남자의 사진이 전국에 깔린다. 그동안 전혀 소식이 없던 그의 가족, 부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알고 보니 그는 결혼한 남자였고 전기 용접공이었다. 비로소 그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는다.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여자는 남자와 헤어진다. 남자는 부인이 있는 곳, 자신의 집으로 가서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이미 이혼 중으로 별거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남자는 부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여자에게 다시 돌아 온다.     


기억을 잃어버려서 과거가 없다는 것은 마치 모든 것을 덮어버린 하얀 눈밭 같다. 과거가 없어서 불행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백지상태. 영화 속 대사가 그러한 상황을 압축한다. 


“앞만 보고 가는 세상 뒤돌아봐서 뭐하나”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보여주는 역설적인 상황은 짠하지만 온기를 잃지 않는다. 빈털터리인 그를 사람들은 외면하지 않는다. 도움을 준 덕분에 남자는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나름의 도움을 준다. 일용근로자들과 부랑자들을 향한 감독의 시선이 따뜻하다. 그들의 처지는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가 둔기로 머리를 맞는 일이 우연이듯이. 남자가 마음씨 좋은 가족에게 발견되어 돌봄을 받는 것 또한 우연이듯이.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는 것도 우연이자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듯이.      


설명할 수 없는 우연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돕기. 그것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영화의 따뜻함이다. 눈이라는 이름의 포근한 이불처럼.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영화 처음 보고 느낀 간략 감상 몇 가지.      


늦은밤 혼자 잠드는 밤. 여자는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적막을 채운다. 외로운 사람들. 혼자인 사람들. 길거리에서 밤에 혼자 잠드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응시한다.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컨테이너 집에 주크박스가 있다. 음악은 잃어버렸던 꿈을 일깨우고 사람들을 모은다. 음악은 사람들로 하여금 춤 추게 한다.       



영화의 스타일이란 곧 감독의 스타일. 스타일이 낯설어도 꾸준히 밀고 가다 보면 관객은 감독의 스타일에 묘하게 설득된다.                                    




++

<과거가 없는 남자> 여자 (이루마 역) 배우 카티 오우티넨은 영화 <남과 여>에서 택시 드라이버로 특별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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