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13번지1화 : 아버지의 원고지
재작년, 초여름을 지나 한여름을 향해 갈 무렵이었다.
서른 여섯, 대학교 친구들과 십 년 전 갔던 유럽 여행으로 독립 출판물을 하나 만들었다. 거창한 의미나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안주 삼아 곱씹어대던 스물둘, 셋에 떠난 유럽 여행을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하기가 아까웠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세 명의 머릿속에서 각색되어 기억이 제각각인 것도 재밌었다. 누군가가 유럽 여행 중 기억에 남는 단어를 제시하면 그날 밤 12시가 되기 전까지 우리 셋은 카톡으로 그 단어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적어 공유했다.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탄생했다.
그 책을 가슴에 안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공주로 향했다. 부모님이 사는 곳은 버스가 하루에 딱 3대 다니는 완벽한 시골이다. 앞에는 조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있는 완벽한 배산임수. 좋은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공간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실 내가 태어나 생활한 곳은 공주가 아니었다. 나름 광역시 중 하나인 대전. 아버지는 내가 16살 때 공주로 귀농을 준비하셨다. 나는 619-13번지에서 4살부터 23살까지 살았다.
21살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엄마는 대전에, 아버지는 공주에, 오빠는 수원에 그렇게 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고, 23살 때 대전 집을 정리하고 공주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이미 나의 서울살이는 시작되었고, 공주에는 1년에 6~7번밖에 가지 않았다. 도시의 소음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여름에는 거실 통 창문으로 보이는 건 초록 세상이고 겨울에는 눈 쌓인 새하얀 논밭을 뛰어다니는 고라니가 보이는 곳. 도시의 소음과 하늘을 찌를 듯한 건물들에 익숙해져버린 내게는 여전히 낯선 그곳. 아버지의 세상.
한때는 출판사와 공연 기획사에서 일했던 딸이, 재작년에는 계약직으로 일하며 가끔 교정 알바를 하며 근근이 먹고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딸이 책을 냈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대하셨다. 물론 독립출판이라는 개념도, 그 시스템도 잘 알고 계시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독립출판물을 부모님께 보여드렸을 때, 내 이름이 아닌 필명으로 쓰여진 것에 대해 굉장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문득 내 책을 살피던 아버지가 물었다.
“이런 거 만드는 데는 얼마나 드니?”
“세 명이서 일단 백 만원 씩 걷었어. 실제로 든 건 2백 만원 정도고.”
“200만 원에 몇 권이나 뽑은 건데?”
“우리? 500권.”
“장편 소설이 나오려면 200자 원고지로 얼마나 써야 돼?”
“장편이면 원고지 1000매는 나와야지.”
원고지 좀 사다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