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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30. 2020

최진사댁 셋째 딸의 비밀

"건넛마을에 최진사댁에 딸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


할아버지는 벼슬은 없지만 해주 최(崔)씨이시고 우리 엄마는 육 남매 중 셋째 딸이었다. 최진사댁 셋째 딸이 제일 예뻤다는 노래 가사처럼, 엄마는 다섯이나 되는 이모들 중에서도 유난히 빛나고 고왔다. 외할아버지는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농사를 짓는 대신 사업을 하셨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빠의 어린시절과 비교해 보면 아주 쪼들리는 집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엄마는 지독한 근시에도 뺑뺑이 안경 대신 콘택트 렌즈를 착용함으로써 미모를 사수할 수 있었고, 공부를 했으면 성적이 어땠을 지 모르나 음악을 해서 대학에 갔고 교사가 되었다. 공무원의 인기가 요즘만큼은 아니었겠으나 나름 일등 신붓감이었다.


스물 아홉이 되도록 모태 솔로였던ㅡ변명을 빌자면 데이트를 할 돈조차 없었다고 한다ㅡ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숱하게 미팅도 하고 주변에 남자친구들도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본 건 아니지만 그렇게 예뻤다니까 뭐. 하루는 신문을 보다가 엄마가 아는 사람이 나왔다. 엄마를 좋아해서 무척 따라다녔던 사람이라고 했다. 좋은 학교에 다녔고, 똑똑했고, 늘 예쁜 글씨로 편지를 보냈던 사람이라고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는 악필이다.) 세월이 흘러 그는 고위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좀 허무했다. "아빠가 편했어."


편하다는 것도 매력이 될 수 있구나. 곧장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덕분에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니 아빠에게 그런 매력이라도 존재했던 것을 감사해야겠지. 아빠는 가진 것이 없었다. 잘생기고 남자답고 하여튼 그런 쪽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엄마와의 첫 만남에 아빠는 맞지도 않는 작은형의 양복을 빌려 입고 여자보다 더 가느다란 손목에 흘러내리는, 역시 큰형에게 빌린 시계를 차고 나갔다. 최악이었다.


엄마는 소개를 주선한 직장 상사에 대한 예의로 힘들게 자리를 지킨 뒤 다시는 아빠를 만날 일이 없으리라 믿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반면 눈치 코치 없는 아빠는 첫 눈에 반해버린 엄마를 운명이라 믿으며 곧 또 다시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두 번째 만남이 있던 날, 아빠는 다방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엄마는 차마 그 순진무구한 남자에게 거절을 말하지 못하고 약속에 두 시간을 늦었다. 이쯤 늦었으면 거절인 줄 알았겠지, 화가 나서 벌써 돌아갔으리라 믿으며 들어선 다방에는 아빠가 여유로이 앉아 신문도 보고 커피도 마시며 앉아 있었다. 심지어 아빠는 조금도 붉어지지 않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엄마를 반겼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여자들은 으레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려니, 그저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행여 엄마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만난 지 세 달만에 결혼을 했다. 퇴근 후에는 거의 매일 만나 데이트를 했고 엄마가 좋아하는 짜장면을 자주 먹었다. 생일 선물로 목걸이를 사 주겠다고, 자신 있게 백화점엘 데려간 아빠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본 엄마는 자연스럽게 가죽 장갑을 집어들고 이 쪽이 더 쓸모가 있고 마음에 든다고 말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결혼 예물로는 공도의 시골 금은방에서 깨알같이 작은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받았다. 그 소박한 예물과, 함께 살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들어간, 당시 돈으로도 오백이나 되는 아빠의 빚과 함께.




스무 살, 뉴욕에서 나는 대구에서 온 한 남자를 만났다. 막 군에서 제대했다는 그는 나보다 네 살 위였고 꽤 어른인 양 행동했다. 처음부터 위압적인 연애였다. 좋아하기도 전에 사귀게 된 것이다. 남자는 어느 날 심사라도 하듯 나를 위아래로 뜯어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키가 너무 작아." (흥, 내 키는 대한민국 표준 키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엄청난 핸디캡을 스스로의 너그러움으로 극복했다는 듯 매일 밤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다. 사귀자는 말에 오케이라는 대답을 할 때까지, 이틀이고 삼일이고 전화를 끊지 않았다.


   한국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렇게 일방적이었던 연애는 어느새 방향이 바뀌어 있었고 간절히 매달리는 나에게 그는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퍼부었다.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나를 떼어내기 위해 그는,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판결문처럼 선고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고작 스무 . 마음을 거둬들인 사람이 그토록 잔인해질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  거리낌없이 약점을 드러내 인 뒤였다.


그는 나를 세워   내가 그를 믿고 나누었던 모든 아픔들을 조목 조목 나열했다. "너는 키가 너무 작아."라는 말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 적도, 나의 핸디캡을 극복한 적도 없었다. 언젠가 나는 나의 유전적 결함으로 기형이  발을 보여  적이 있었다. "너는 발도 못생겼어. 너희 엄마도 그렇더라." 그는 딸이 처음으로 데려온 남자친구에게 친절을 베풀어  우리 엄마까지 들먹이며 나를 아프게 했다. "그러니까 왕따를 당했지." 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을 만난 건 길어야 육 개월, 헤어지는 데에는 삼 년이 걸렸다. 나는 그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린 낙제점에 가까운 평가를 고스란히 진실로 받아들인 채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나에게 어느날 쌍심지를 켜고 돌변할 지 모를 누군가를 믿고 사랑할 수도 없었다.




막내 이모는 다운 증후군 환자였다. 엄마는 사춘기 때부터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모의 존재는 가족들의 아픔이었고 때로는 불행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 평생을 돌보아야 할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드러내지 못할 비밀이었다. 엄마는 예쁘고 완벽해 보이는 여자였지만, 그래서 더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부담스러웠을지 몰랐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반대했다. 나는 일등 신붓감이 아니었지만 나이가 어렸고 곧 시험에만 통과한다면 그럭 저럭, 괜찮은 신붓감이 될 수도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적어도 딸바보인 아빠의 시각에서는 그러했다. 아빠는 홧김에 돈 오백만 원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나를 결혼 정보회사에 등록했다. 심사는 엄격해 보이지만 다 장삿속이 아니겠는가. 아빠는 따님 정도면 높은 등급의 배우자를 매칭해 줄 수 있다는 장사치들의 말에 힘을 얻어 더욱 더 거세게 결혼을 반대했다.

엄마는 일찍이 남편을 예뻐했지만 자식 일에만큼은 독불장군같은 아빠의 강경함을 꺾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엄마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이렇게 불완전한 나를 누가 사랑해 주겠느냐고. 이렇게 부족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나는 그 어떤 것보다 그 이해가 필요하다고.


엄마는 나의 말에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아파했다. 나는 자라면서 크게 힘듦을 내색한 적 없는 딸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누구보다 나의 마음을 이해했다. 마음껏 나를 사랑해 달라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우길 수 없는 마음을 엄마는 알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엄마는 무조건적인 나의 편이 되어 주었고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던 아빠의 완강한 태도를 설득해 상견례 자리로, 결혼식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그 날에 엄마가 말한 '편안함'이라는 매력은 나의 아픔을 보여주어도 될 것 같은 사람,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더라도 내 곁을 지켜줄 것 같은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었을 테다. 누구든지 멋지고 완벽한 사람 앞에서 약해지기란 어렵다. 어딘가 부족하고 측은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 나의 고민과 아픔도 무장해제되기 마련이다. 엄마에게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최진사댁 셋째 딸에게는 예쁜 외모에 가려진 아픔이 있었다. 그녀는 그 어떤 조건이 아니라 오랜 아픔을 감싸 줄 따뜻한 남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온전히 사랑받았다. 나는 엄마처럼 예쁘게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아빠만큼 마음이 넓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원인 모를 건선으로 고생하는 남편의 등에 꼼꼼히 스테로이드제를 발라 주고, 그는 나의 못난 발을 주물러 주면서. 온갖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나 자신을, 나의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까지도 사랑한다.


우리는 타인의 완벽함에 끌리기도 하지만, 때로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그 비이성적인 판단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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