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밤 Oct 05. 2020

뉴욕에는 뉴요커가 없었다

Everybody wants to be real

학창시절 제법 따돌림도 당해 보았고 한결같이 남녀노소에 크게 인기 있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스무 해를 살아온 우물 안의 세상은 사실 내게 꽤 친절한 편이었다는 걸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깨달았다. 순진했던 나의 기대 속 외국인들은 교양 프로그램 vj 카메라의 화면 속에서처럼 친절하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지만 맨하탄 구경을 시작하던 첫 날부터 결코 녹록치 않을 이 도시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What size? 다분히 억양을 섞은 말투를 알아듣지 못한 나에게 세계적인 커피체인의 점원은 친절하게도 ‘알아서밴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계산해 주었고  마시지도 못한 커피를 아깝게 버리고 일어난 나의 마음도 몹시 쓰라렸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한국인과 일본인마저 똘똘 뭉쳐 지내던 어학원에서의 3개월을 뒤로 한 채 퀸즈의 외곽 지역으로 이사를 하고, 동양인이 없는 직업 교실에 입학하며 그 쓰라림은 때로 아프게 다가왔다.


팀을 이루어야 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어느 날, 새벽 술집에서 기분 좋게 취한 동료가 이제는 개운하다는 듯한 얼굴로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너와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 잘 했다고, 고생이 많았다고.


함께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말에, 일종의 자격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것에 어째서인지 썩 즐겁지만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같은 동료라고 느끼며 함께 어울리던 그 자리가 오히려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끊임없이 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랬다. 농구나 골프, 운동을 잘 하는 사람. 음악이나 미술, 예술을 잘 하는 사람. 내지는 돈을 아주 많이 번 사람. 내가 상상했던 ‘진짜’ 미국인이 아닌 미국인들 역시도 탁월함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퀸즈의 우리 동네로 가기 위해서는 메트로를 한 번 갈아타야 했었다. 잭슨 하이츠, 루즈벨트 애비뉴의 환승 구간은 히스패닉이라고 불리는, 역시 '미국인'이 아닌 미국인들로 언제나 붐볐다. 여기가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모를 정도로 이민자들이 많은 도시였다. 흑인들 역시 어딜 가나 많았다. '진짜' 미국인들은, 내가 걸어다니고 내가 생활하는 뉴욕 밖에, Upper East의 평화로운 그들만의 지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았던' 도시 뉴욕에는, 이상하게도 뉴요커가 없었다. 진짜처럼 보이는 미국인들도 뉴요커는 아니었다. 뉴욕에서 크고 자란 사람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모두들 어딘가 다른 곳에서, 꿈을 안고 이 곳에 왔다. 안락한 고향의 집을 두고 떠나와 작은 셋방을 얻어 그마저도 룸메이트와 나누어 썼다. 그들 역시 치열하게 살았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뉴욕을 떠날 날이 가까워오며 서울에서는 쉽게 떠나지 못할 동부의 도시들을 차례로 여행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어색할 만큼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고 재채기 한 번에도 "God bless you!"가 이구동성으로 울려퍼지는 경험을 했다. 지나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어렴풋이 생각했다. 어쩌면 대부분이 이방인일 뿐인 도시.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도시에서 친절과 여유를 바란 내가 무리였다고.


2006, Union Squre. 이민법 시위

2006년 4월, 강화된 이민법이 발표된 그해 봄에는 곳곳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에서, 이제는 진짜 미국인과 가짜 미국인을 구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센트럴파크를 품은 맨해튼의 고급 주거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흑인들이 살고 있는 브롱스, 히스패닉과 아시안이 점령한 퀸즈로 이어지는 도시, 뉴욕.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유색인종과 불법 이민자들로 이미 채워진 도시, 뉴욕.


그 날 한 피켓에 쓰여 있던 문구를 기억한다. "Who is real American?" 그 도시에서는 누구든지, 진짜가 되고 싶어했다. '진짜'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