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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4. 2020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반드시 작가가 될 거예요."

"반드시 작가가 될 거예요."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때로는 장난이었고 때로는 진심인 적도 있었지만, 그날처럼 그렇게 확고한 마음으로 말한 적은 결코 없었다. 나는 뱃전에서 어머니가 천천히 손을 흔들며 행하고 있던 작별 인사에 답하면서 부두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탄 배는 부스러기 같은 배들 사이로 사라져 갔다. 나는 내 내장을 갉아먹고 있던 조바심 때문에 흥분한 상태로 서둘러 <엘 에랄도> 사무실로 갔고, 어머니가 내뱉었던 문장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소설을 숨도 제대로 고르지 않은 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집을 팔려고 하는데 같이 가 줬으면 좋겠구나."
150p,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민음사. 마르케스 자서전 중에서.


요 며칠 좀 얼떨떨했다. 사흘 전 브런치에 업로드한 몇 개의 글이 플랫폼 메인과 포털 상단에 걸리며 하루 5만, 이틀째 10만이라는 믿기 힘든 조회수를 올린 것이다.


휴대폰과 연동된 시계의 알람은 몇 분도 되지 않는 간격으로 종일, 요란스럽게 울렸고 영문을 모르고, 궁금해하지도 않던 나와는 달리 이 해프닝의 출처를 꼭 알아야겠다는 남편이 기어코 찾아낸 내 글의 행방은 카카오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포털의 '홈 앤 쿠킹'이라는, 다소 겸연쩍은 섹션에 있었다.

주식 갤러리면 어떻고, 부동산 커뮤니티면 또 어떠랴. 일기장에나 적고 말 법한, 아니, 굳이 글로 남길 의미조차 있을는지 고민하던 시시한 이야기들을 공감받는 기분은 너무나 짜릿했다. 결국 이런 순간들을 위해 지난 봄과 여름을 비슷한 몇 개의 단어들, 흐릿해진 기억들과 씨름하며 보내온 것이리라 생각하니 이미 좋아서 한 일인데도 다시금 행복해졌다.

 



작년 이맘때 즈음, 페르난두 페소아의 유작 산문집을 읽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받아 든 첫날, 이름부터 생소한 포르투갈 작가의 일대기가 궁금해 표지 안쪽, 작가 소개란을 먼저 펼쳐 보았더랬다.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로 시작하는 소개글은 "1935년 일생을 마칠 때까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는 다소 기대 밖의 문장으로 짧게 끝이 났다. 그것이 무려 포르투갈 현대문학을 이끌었다는 위대한 작가에 대한 설명 전부였다.

사후에 발견된, 무려 27,543매에 달하는 미공개 원고들의 방대한 분량에 비해 그의 살아생전 출판된 책이라고는 영어로 네 권, 포르투갈어로 된 한 권의 시집 뿐이었고 실명으로도 딱히 유명인은 아니었던 그는 심지어 무려 75개나 되는 필명들을 사용하여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궁금했다. 대체 그는 정말 유명해지고 싶기는 했던 것일까. 그러길 바랐음에도,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는 그저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로 만족했을까?

당시 내가 내린 주관적인 결론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짓고, 깊은 철학적 사유에 빠져 있었던 예술가라면 다른 누구의 평가 없이도 스스로의 재능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믿었다.


누구를 위해 글을 썼든, 그는 평생을 오직 글쓰기에 바쳤다. 그리고 백 년 전 그가 그토록 치열하게 써내려간 문장들은 21세기, 지구 반대편의 일상을 살아가던 나에게로 와 커다란 울림이 되었다.

그의 글이 묘사한 어떤 계절의 풍경은 나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세계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밀해서,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세계를,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로 존재하는 것들을 초연히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전공 서적만큼 두꺼운 그의 산문집 어디에서도 밝고 경쾌한 감정은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습하고 어두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일같이 셋방에 처박혀 글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어울려 지내는 사람 하나 없이 결국 동네 식당에서 우연히 몇 번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 작가에게 자신의 원고를 부탁하고 말았다는, 책 서문에 등장하는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비쩍 마른 그 남자'의 정체는 바로 작가 자기 자신을 묘사한 것이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두껍고 우울한 책의 독서를 마친 나는, 사춘기 소녀 같은 결심을 했다. '그래,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괜찮은지 몰라. 내가 좋아서 쓰는 거니까.'




기껏해야 포털사이트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는 감격으로 설렘과 떨림, 혼란스러운 기분에 휩싸여 있던 며칠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설레고 좋았다. 뭔가를 드러내고 싶어 용을 써도 관심받기 쉽지 않은 것, 그런 것이 인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조회수가 오르고, 공감의 좋아요 버튼이 눌러질 때마다 다시 읽고, 또 읽어보게 되는 나의 글은 쓸데없이 길고 조잡스런 개인적 감상에 불과해 보였다. 아무래도 다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 별 볼일 없는 이야기를 공감해 준, 소중한 시간을 내어 끝까지 읽어 준 분들의 마음만은 너무 귀한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나의 형편없는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일생을 다해 쓸 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 가 닿기를 기대하는 그 솔직한 마음마저도 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아마도, 짐작컨대 그는 결코 유명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글을 통해 본 그는 '열정조차 배제된, 고도로 다듬어진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보다 위대한 자연과 사물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자아조차, 꿈조차 내려다보기를 원했다. 기나긴 숙고의 시간과 절대적인 고독, 그것이 그가 추구하던 삶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가 서랍 속에 남기고 간 위대한 글들은 결코 그와 같이 고독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나는 감히, 고인이 된 작가 역시 자신의 글이 서랍 속의 서류뭉치로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그토록 치열했던 글쓰기는 결국 그가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건 그가 고독한 가운데서도 무언가를 세상에 끊임없이 이야기하길 원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요 며칠은 아무것도 차분하게 써지지가 않았다. 오늘 하루는 아예 노트북을 덮고, 들뜬 마음을 가다듬을 요량으로 책을 읽기로 했다. 왕성하던 여름이 맥없이 저물고,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 9월의 아름다움과 처연함을 즐겨 묘사한 페소아의 문장들을 찾아 책을 집어들었다.

오늘도 나는 그가 남기고 간 글들을 통해 그의 재능을 동경한다. 그가 고르고 고른 단어들이 부딪혀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훌륭한 문장이 나를 설레게 한다.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던 오늘의 나를 글쓰기의 세계로 이끈다.


<백 년의 고독>이라는 불멸의 고전을 남긴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이제 막 글을 배운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시절, 자신의 삶에 관한 첫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어린아이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더구나 실제로 소설가가 되리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때부터 말이다.

그의 자서전에서 "글을 쓰고 있어요.", "작가가 될 거예요."라는 수줍은 문장들을 발견하며, 그 위대한 작가에게도 아주 미약한 시작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작가로서의 나는 이제 막 글을 뗀 어린아이와도 같다. 나의 글쓰기가 형편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다시 마음먹는다.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당분간은 형편없는 글을, 꾸준히 쓸 것이다. 언젠가는 소설을 쓸 것이다. 그리하여 진짜 작가가 되리라.


나는, 이야기하며 살고 싶다. 이야기하기 위해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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