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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ㄷㅣㅁ Oct 24. 2023

네, 제가 바로 고시 면탈자입니다.

나 인성에 문제 있어?

고시 그 이후,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나 둘 적어내려갔던 글을 올린지가 벌써 한 달이 되어가네요.

결과를 기다리며 일본 여행기를 꼭 마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초안만 잡아둔 채 발행을 기다리는 글들만 늘어나던 가운데 이렇게 또다시 다른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너무 감사하게도 2차 합격이라는 결과를, 그리고 아쉽게도 3차 탈락이라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정해진 운명...


고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2차만 붙으면 끝난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본 직렬의 경우만 해도 3차에서도 약 60명 중 14명, 그러니까 25%가 떨어지기 때문에 결코 2차 합격만으로는 기뻐할 수 없습니다. (사실 확률적으로 저 25% 안에 드는게 더 어려운 일인데 말이죠;;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내버렸네요 ㅋㅋ큐ㅠ)


그럼 면접은 무얼 보느냐?

사실, 면접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2차 시험이 '보석'을 가려내는 것이라면, 3차 시험 즉 면접은 잘 골라진 보석들 중 이물질이 딸려오지는 않았는지, '짱돌'을 가려내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공무원으로서의 인성이나 자질에 크게 부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솎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사혁신처에서도 공지하고 있듯, 사실상 3차에서 '우수'나 '미흡'을 받지 않은 이상, 이미 2차 합격자가 발표된 순간부터 운명은 정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면접에 응시하는 모든 수험생들은 '2차 합격자'라는 동일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뒷면에는 이미 2차 성적순으로 합불 여부가 적혀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인 셈이죠.


물론, 간혹 2차 성적을 뛰어넘을 정도로 '우수'한 기량을 발휘한 면접자에게는 그 줄세우기를 뛰어넘어 최종합격자가 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매우 드문 일입니다. 역시 '미흡'도 거의 주어지지 않습니다. (면접관 따귀를 때려도 미흡이 안 나온다는 말이 돌 정도입니다.....) 따라서 고시판에서는 2차 성적순으로 최종합불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 정론으로 자리 잡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들 자신의 2차 성적, 즉 등수를 알지 못하기에 면접을 위해 최선의 준비를 합니다. 누군가는 희박한 '우수'의 확률을 바라보며 , 또 다른 누군가는 '미흡'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2차 발표 후 면접까지 주어진 약 3주에서 한 달가량의 시간 동안 자신의 노력으로는 실질적으로 바꿀 수 없는 주어진 운명대로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 기간동안 할 수 있는 거라곤 후회가 되지 않도록 면접준비를 하는 것뿐이기에, 밤을 새가며 국정과제를 외우고, 공직가치를 마음에 새기며 고군분투합니다. 그래서 고시 면접준비 기간에는 '과투입'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합니다.




저 인성에 문제없습니다;;


어쨌든, 면접에서 탈락했다고 하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아주 치명적인 하자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성적순에 의해 정해진 운명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성적표를 한 달 늦게 받았을 뿐인 셈입니다ㅠㅠ....

ㅠㅠㅠㅠ 없는데 흑...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2차 합격 발표날,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공식 발표 하루 전날 합격자에게만 발송되는 문자를 기다렸을 때, 마침내 핸드폰 진동이 울렸을 때 그때의 기분을 잊지 못합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고, 응원해 준 부모님도 할머니, 이모, 삼촌, 작은엄마와 사촌오빠, 친구들을 비롯해 나의 사람 모두가 함께 기뻐해주었습니다.


그 기쁨과 환희가 너무 일렀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문자를 받지 못했으니까요.



최종합격자와 면탈자 간 2차 성적의 차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5과목의 평균의 소수점아래 두 자리 단위만으로도 희비가 갈리곤 합니다. 점수 총합으로 치면 그래봤자 1-2점 차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토나올 정도로 빽빽하게 줄세워진 우리의 운명을, 엇갈린 희비를 누군가는 관운(官運)이라고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그 또다른 이름은 실력이기도 하겠다싶습니다.

큰 차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적게는 0.5점, 많게는 약 5점 정도 제 답안이 부족한 것이었을 테니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이임은 분명하니까요.


고시 중독이라는 말 한번쯤 들어보셨을텐데, 참... 이게 일이 이렇게 되어보니 무슨 마음인지 너무 알겠더라고요. 줬다 뺏는게 세상에서 제일 나쁜거라고 약 오르기도 하고, 고작 몇 점 차이로 당락이 갈린다니 분하고 오기가 생기기도 하면서도 과연 그 미치도록 힘든 공부를 1년을 더 할 수 있는가, 1년 뒤의 나는 조금 더 나아져 있을 자신이 있는가 불안하기도 합니다.



흩날리는 벚꽃을 못본체,
시원한 바닷소리를 뒤로
낙엽이 지는지, 첫눈이 언제 왔는지
계절을 모르고 갇혀 지냈던 시간들.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의 시간들을 고이 접어 미뤄두며 펼쳤던 수험서.

근육이 빠져 흐물해진 다리와 질펀해진 엉덩이 그리고 망가져버린 손목.

무엇보다 속절없이 흘러간 나의 청춘.

어쩌면 기약 없는 영광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바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바칠 만큼 내가 꼭 해보고 싶었고 이뤄내고 싶은 것이기도 하지요.



합격의 축배와 탈락의 고배를 연거푸 마시고 난 뒤 느낀 점이 있다면, 나는 생각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년의 나는 우울과 좌절에 휩싸여 허덕였지만, 그리고 올해 역시 무한한 듯 느껴졌던 기다림의 시간 동안 지쳐갔지만, 막상 결과를 알게 된 지금 나는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합니다. 이러한 지금의 내 상태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감정체계가 나를 보호하고자 발동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난 굉장히 이성적인 상태입니다.

3년이 조금 넘은 수험기간 동안, 나는 닳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더군요. 나의 일부분은 비록 닳아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또 다른 부분은 인고 끝에 아주 단단하게 잘 제련이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운명을 마주하게 된 어제의 나는 약속된 오후 6시가 지나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새벽 5시까지 퀴블러 로스의 5단계를 계속해서 오르내렸었죠.

그치만 이 하루만큼은 온전히 나의 감정을 날뛰는 대로 둘 작정이었습니다. 하루를 온전히 나에게 바치고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준 뒤에 마음을 다잡고 다음 걸음을 결정하겠다고 다짐했었죠. 그렇게 오늘의 나는 어제 충분히 슬퍼하고 울어둔 덕에 이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얘기이지만, 나는 우리 마음에는 감정을 담는 그릇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감정이란게 샘솟는 샘물 같을 때도 아니면 그릇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메말라 버릴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어떠한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무감의 상태도 문제이겠지만,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은 감정을 제때 비워주지 않으면 아주 작은 자극에도 마음에 물바다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이란건, 적당한 때에 충분히 느껴주어 흘러 넘쳐버리지 않도록 비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아직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합격발표가 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는 모두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스스로에게 감정을 터트릴 수 있는 하루를 주고, 점수가 나온 오늘은 함께 공부했던 그리고 아쉽게도 함께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된 소중한 인연들과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다독이고 재도전을 꿈꿔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번주의 남은 날들 동안 충분히 고민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씩씩하게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볼 것인지 결정할 예정입니다.


저도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냉정하게 그렇지만 가슴이 이끄는대로 가장 나다운 선택을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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