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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ㄷㅣㅁ Nov 15. 2023

고시, 마지막 다시 -1편-

나는 어떻게 살것인가

다시 고시 합니다. 정말 마지막으로요.

고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글을 완성한건 발표가 난 그 주의 일요일이고 전 지난주부터 열심히 달리고 있거든요!!)

어쩌면 점수발표가 난 그날부터 난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지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또 다시 지옥같은 공부와 또 다른 1년의 결과가 뒤쳐짐일지, 행복을 위한 유예기간일지 모르는거니까 다시하겠다고 선포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나


앞으로의 8개월, 1년이 또 다른 그저그런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더 나아간 한걸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달라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난 달라졌고, 달라진 나는 이 익숙한 시험과 이전과는 다르게 싸워 승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달라질 수 있었던 건 다음의 이유들 때문입니다.


우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저는 엥푸삐(ENFP)입니다. (MBTI 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정적 교류가 중요하며, 시도때도 없이 펼쳐지는 무한의 상상의 나래속에서 나도 모르게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르곤 할 때면 내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을 수 있도록 붙들어 메줄 든든한 나무밑동이 필요합니다.

고시는 이런 저의 성격과는 너무도 맞지 않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그동안 수험생활을 하면서 저를 가장 괴롭혔던 건 공부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대학교를 다닐 때도 명강의를 골라 듣는 명강의 헌터였는데요, 취업이 중요해지고 나날이 학점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가차없이 씨(C)를 뿌려대는 줏대있는 교수님들의 명강의는 기피대상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전쟁같은 수강신청 기간에 혼자 잔잔한 호수 위를 헤엄치는 백조처럼 원하는 강의를 골라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어쨌든, 하고자 했던 말은 저는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고시공부가 그리 유쾌하지 않은 날들도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공부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게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고독이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도, 임박한 시험의 스트레스보다도, 지독한 외로움과 세상에서 잊혀져간다는 슬픔을 이겨내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약해빠진 소리처럼 들리는데, 맞아요. 저는 혼자서는 너무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혼자 하는 공부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우리들끼리는 농담삼아 우리들을 '유사입장국 like-minded state'라고 부르곤 합니다...하하..웃프군요) 든든한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최종합격문자를 받지 못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수험기간을 함께 싸워줄 런닝메이트들이 생겼습니다.

 

공부를 같이 한다는게 정말 리터럴리(literally) 같이 복닥복닥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단지, 바로 옆자리에서 나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 존재만으로도 나는 넘어지지 않고 더 오래 달릴 수 있습니다.

함께 시간을 정해놓고 루틴에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것, 겪어보지 않은 자는 이해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이 답답한 감정을 토로할 상대가 있다는 것, 정말 소소하게는 함께 밥을 먹고 등하교길을 걷는 것.

이 사소해 보이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 새로운 무기가 되어줄 겁니다.



그리고, 난 이미 이 문턱을 밟아 본 경험이 생겼습니다.

비록 문턱 넘어 최종합격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사실상 고시의 당락을 결정하는 2차 시험 점수의 문턱을 이미 밟아보았습니다. 터무니없이 높게만 느껴졌던, 실재하는 것일까 의문을 품었던 그 문턱을 난 보았고 심지어 아주 아슬아슬하게 넘을뻔 했습니다.


자만해서는 안 되겠지만,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았으므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실체 없는 오아시를 찾아 사막을 헤매는 여정과 내가 가본적 있는 심지어 아주 가까이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바다를 향해 가는 여정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또, 난 좀 뻔뻔해졌습니다.

남들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에 고시를 시작했고, 생각보다 수험기간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워낙 시끄럽게 인생을 살았던 지라, 그리고 나는 아니라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의 쓸데없이 화려한 언변과 몸짓 그리고 눈빛에서 발산되는 특유의 자신감 때문에 난 늘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처럼 비춰지곤 했습니다.

주변사람들은 나에 대해 기대를 했어요. 그리고 난 그 기대를 즐기며 살았지만, 고시를 시작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이 되더군요. 그래서 아주 친한 친구, 채리와 카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고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수많은 단톡방에서 잠수를 타고 고독하게 수면 아래로 잠기는 것을 택했습니다. 한참의 잠영으로 조용히, 하지만 치열하게 레이스를 펼치다가 그 끝에 더 멋있어진 모습으로 짠! 하고 등장하는 그 날만을 꿈꾸면서요.


부모님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그만큼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결과들도 많았던터라 기대가 점점 커졌겠지요. 고시를 진입한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오래 걸릴지 아마 모르셨을거에요. 뭐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이 전략은 그다지 좋은 전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늦어질수록 불안함과 초조함이 배로 더해져갔으니까요.

이미 사회에 나가 제 살길을 찾은 친구들, 후배들은 어느덧 새내기 사회인들을 맞이하는 선배가 되어있고, 두살 터울의 제 동생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잊혀져가고, 부모님께 기생하면서 서른에 가까워지도록 제 앞가림 못하는 식충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속이 쓰리고 마음이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런 고민을 하고 감정에 매몰될 시간에 더 집중해서 빠르게 합격하는 길이 오히려 효도이고, 나의 사람들과 기쁘게 재회할 수 있는 길인데 말이죠. 핑계를 찾자면 엥푸삐라서 그런거일까요 ... 하하… 뭐 여하튼 그게 잘 되지 않아 아주 작은 자극에도 쉽게 무너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뭐 어차피 잊혀졌는데, 어차피 늦어졌는데 1년 더 늦어진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이상하게도 오히려 홀가분해졌습니다. '아니 어차피 합격하고 나면 그 누구보다 더 멋지게 활동하면서 부모님에게도 내 사람들에게도 자랑스러운 딸, 친구가 될텐데, 1년 더 기다려달라고 하지 뭐!' 하는 생각이랄까 ...ㅎㅎ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굉장히 뻔뻔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근데 이게 맞는거같아요. 다른 감정, 생각 다 꺼져!!!!!!!!!!!! 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되어보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난 도박을 하지 않을 겁니다.

고시는 도박이 아닙니다. 

이미 전재산을 다 잃어버렸는데도 일획천금의 유혹에 눈이 멀어, 또는 요행이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초점을 잃은 눈으로 또 다시 도박장에 몰려드는 도박쟁이처럼 그저 운에 내 운명을 맡겨버려서는 안 됩니다.


고시는 아주 치밀한 전략게임입니다.

나의 전략과 실력 그리고 노력이 모두 반영된 결과가 산출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약간의 관운(官運)이라 불리는 것이 분명 존재는 하므로 게임은 게임입니다. 그런데 뭐 이 세상에 우리내 삶에 우연과 운으로부터의 성역이 있나요. 삶의 다른 부분들처럼 고시도 딱 그정도 우연과 운이 따를뿐, 온전히 그에 의존하는 도박과는 다릅니다.


그동안 P라는 핑계로 계획과는 먼 수험생활을 보냈습니다.(어쩌면 난 MBTI를 자기정당화를 위해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촘촘하고 세세한 전략보다는 그날그날의 나의 컨디션과 '공부빨'에 기대어 도박을 한건 아닌지 반성했습니다.

이번에는 과목별, 기간별 전략을 세우고 수험기간동안 나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변수들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세웠습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숙제로 하루계획표 짜기를 시작으로 수험생활 스터디플래너 한번 쯤 다 써봤을거에요. 우리는 살면서 꽤나 어린시절부터 계획적인 인간이 되도록 교육받습니다.

나는 그 교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초등학생 때 애써 색칠까지 해가며 꾸며놓은 계획표와는 너무도 다르게 흘러가는 나의 하루를 마주하며 좌절감과 스트레스를 적잖이 느꼈고, 고등학교,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런 계획이 오히려 내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계획없이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계획들이 늘 실패로 돌아갔던 것은 늘 터무니없이 거창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입니다.나는 '내가 마주하는 스스로의 나'와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간의 괴리가 꽤나 큰 사람이라 그 이상을 바라보고 계획을 세울 때면 현실의 내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늘 많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어쩌면 난 늘 처음부터 이행할 수 없는 계획들을 세웠는지도.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다행이게도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내가 나의 2N년 중 가장 가까운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말했듯, 난 이미 문턱 가까이 와있으니까요. 그리고 면탈자에게는 1차 시험 면제라는 특혜 (라면 특혜지만... ㅎ 애초에 걍 다 뽑아주지 엉엉)가 주어지기 때문에 이전보다 시간이 조금 더 있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채찍질하는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전 8개월을 달려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계획대로 잘 움직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2편 -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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