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5. 장나라-겨울일기
올 해는 원숭이띠인 내가 삼재라고 했다. 그런 걸 딱히 믿는 편도 아니었으면서 막상 내가 삼재라고 하니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 때면 '아, 역시 삼재라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연말을 맞아 삼삼오오 모일 생각에 들떠있는 12월, 한 주는 허리를 삐끗해서 치료받으러 다니느라 한 주는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느라 강제로 차분한 연말을 보내며 '역시 삼재라 그런가'하는 생각을 또 잠깐 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예고된 불운의 기간은, 이런저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이 정도면 괜찮지'라는 식의 위로가 되기도 했다.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석 달 추운 겨울이 있듯 십이지로 볼 때에도 3년의 재난이 드는 기간이 있는데 어쩌면 더 나쁘게 지나갈 수도 있었으나 이 정도면 잘 넘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들쑥날쑥 불안했던 한 해의 마음을 다잡아준 가장 튼튼한 무기는 '일상의 기록'이었다.
어딘가에 하소연해봐야 해결될 것 같지 않던 갖가지 생각들을 안고 시작한 한 해, 바깥으로가 아닌 마음 안의 공간에 더 많이 풀어놓고 귀를 기울였다. 퇴근 후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이야기하기 바빴던 일상을, 곧장 집으로 돌아와 조금 일찍 하루를 마무리하는 식으로 변화시켰다. 깨끗하게 씻고 다락방에 올라가 낮은 조도의 조명과 함께 일기를 쓰곤 했다. 인간관계에 허무하고 외로운 날에는 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오래오래 일기를 길게 썼다. 일기 속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그럴듯하지도 문장이 매끄럽지도 않았지만 나에게 가장 진솔한 언어로 쓰인 일 년의 고백이었다.
연말을 맞아 새로운 다이어리를 구매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책꽂이에 추가될 열네 번째 다이어리는 흰색 가죽 표지에 데일리 페이지가 한 장으로 배분되어 하루의 일상을 넉넉하게 털어놓기 좋은 제품으로 구매했다. 매일매일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에피소드들과 상대방과의 대화들을 꾹꾹 눌러 담았던 이십 대의 일기와는 다르게 삼십 대의 일기장은 에피소드보다는 깊은 생각들이 넉넉하게 담겼다. 마구 설레고 신나고 흥분되던 감정보다 차분하고 반성하고 감사하는 감정들이 더 많이 쓰인다.
예전에는 재미 삼아 과거의 일기들도 다시 읽어보곤 했는데 이제는 한번 책장에 꽂힌 과거의 일기장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출렁이는 과거의 기록들에 혹여나 현재의 내가 휩쓸려버릴까 봐,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과거의 기록을 다시 꺼내보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올해의 일기장 역시 12월의 마지막 날, 다락방에서 하루 종일 읽어 내려간 뒤 표지를 덮으면 앞으로 몇 년 뒤에 다시 열어보게 될까?
그럼에도 여전히 이렇게 매일같이 기록을 한다. 얼마 전 우연히 7년 전 팟캐스트에 올려둔 음성 파일이 생각나서 찾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라디오를 좋아했던 그때의 내가 혼자 노래도 틀고 좋은 글도 읽어주며 남겨놓은 생각의 기록이었는데 교정 전이라 어눌한 발음을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곧 끄긴 했지만 기분이 참 이상했다. 딱 그 나이에 늘 해오던 생각을 내 목소리로 듣는데 철없어 보이기보다는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그때의 내가 참 멋있었다. 비록 발음은 구렸어도, 반짝반짝 빛났다. 글이든 음성이든 예전의 기록들을 보며 그런 많은 감정들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도 아닌데 예쁘게 다듬어져 있던 기록. 지금 와서 보니 다른 누구도 아닌 미래의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들이었나 보다.
기록하는 사람은 강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과거의 내가 기록을 통해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 덕분이 아닐지.
2022년의 마지막 달, 수플레의 기록입니다. 기록하는 습관을 오래 이어오고 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습관이 있어 참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일해온 것, 보고 들은 것, 여행한 것들이 글과 그림, 음성, 영상 등 다양한 조각들로 곳곳에 남아있었거든요. 그런 기록들은 아주 자주 꺼내보게 되지는 않는 것들이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에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위로해주고 강하게 만들어주거든요.
오늘부터라도, 이 소중한 순간을 기록해보는 습관을 가져보시길 추천드려요. 제가 해봤어요. 참 좋거든요.
https://www.youtube.com/watch?v=nCKNUg96Ams
오늘의 수플레는 장나라의 '겨울일기'입니다. 들을 때마다 묘한 설렘을 주는 노래인데요.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마무리, 따뜻하게 수플레와 함께 마무리하셨으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