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카페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니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무리 지어 지나간다. 아주 붐비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이 오간다.
나는 크루아상을 먹으며 머리로는 ‘어떻게 하면 크루아상을 우아하게 먹을 수 있을까 대체?’를 생각하고 부스러기가 흐르지 않는데 집중하는 동시에 바깥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계속 관찰했다. 유리로 막혀 있어 대화는 전혀 들리지 않지만 분명 따듯한 날씨에 잔뜩 들뜬 채 신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일 것이다.
그들에게 유리창 반대편에서 크루아상을 먹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대화를 나누느라 카페에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자체에 관심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고 이 유리창은 바깥에서는 다소 덜 비치는 재질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이 인지하게 되더라도 단지 ‘카페에 앉아 책을 펴놓고 빵을 베어 무는 노란 옷을 입은 사람 1’, 마치 늘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만 같은 ‘노란 여자 NPC' 같은 존재일 것이다.
어린 내가 늘 하던 상상이 나만의 특이한 점인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꽤 많은 어린이들이 같은 상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상상이다.
나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어릴 때 유행했던 ’심즈‘에 대입하여 나와 가족, 몇몇 가까운 주변인을 제외하고는 다 NPC처럼 입력된 대사를 하고 자율적인 감정이 없으며,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파워 off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 무서워하기도 했다.
이십 대 중반까지도 어딜 가나 속해있는 집단에서는 주인공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고 함께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그런 생각을 지웠다. 오히려 가끔은 어떤 집단에서 완벽한 주변인, 나아가 리액션 하는 NPC1(31, 직업은 행사 기획자)가 되었음을 빠르게 파악하기도 한다.
빵을 먹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오히려 안도감 때문이다. 주목받지 않고 NPC1이 되었다는 완벽한 확신으로부터 오는 편안함.
부스러기를 흘리며 크루아상을 우아하게 먹지 않아도, 책장을 펼쳤다가 몇 장 넘기지 않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편안함이다.
그럼 어렸을 때부터 그런 편안함을 느껴야 하나?라고 한다면 대답은 ’절대 아니‘다. 어릴 때는 오히려 관심받고 사랑을 독차지하고 주목받는 것에서 오는 반짝거림을 느껴야 한다. 심즈 월드 같은 내 세상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것에 집중하고 온전히 축하받고 관심받는 경험.
그렇다면 또 생각해 본다. 어린 나는 온전히 관심을 받았기에 그런 ’주인공인 세계‘를 창조해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