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마(Naoshima, 直島)_3
오카야마현 출신의 후쿠다케 데츠히코(福武哲彦_ふくたけ てつひこ, 1915-1986)는 지역 고등학교 교사였다. 한때 후지출판(富士出版,1949년)을 설립하여 학습 문제집 사업을 하지만 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1954년 파산한다. 이듬해 후쿠다케쇼텐(福武書店)으로 학생 수첩등을 제작하면서 그의 꿈은 시작된다.
1963년에는 통신교육 격인 진연세미나(進研ゼミ)로 고교 강좌를 시작하고 중학교 전국 모의시험을 다루는 종합교육정보출판회사로 성장하면서 통신교육과 출판 업계의 선두에 서게 된다.
본사를 오카야마(岡山)에 마련한 후쿠다케쇼텐(福武書店)은 이후 1995년에는 상호를 베네세(Benesse Corporation)재단으로 변경하였고 현재는 직원 2만여명의 교육 사업을 대표하는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꿈이 있었다. 베네세 재단은 혼슈, 시코쿠, 큐슈에 둘러싸인 안쪽 바다 세토내해(瀬戸内海)의 작은 섬, 나오시마(直島)의 절반을 사들였다. 전세계 아이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1985년 후쿠다케 데츠히코(福武哲彦)는 나오시마 촌장을 만나게 된다. 당시 촌장이었던 미야케지카쓰쿠(三宅親連)는 나오시마에서 26년째 촌장을 역임(그는 1959년 5월부터 1995년 4월까지 무려 36년간 촌장으로 재직할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하고 있을 때였고, 그들은 낙후된 섬을 깨끗하고 교육적인 문화 공간으로 개발하는 것에 뜻을 같이 하게 된다.
2000 년에는 세계적인 여행 잡지 'Conde Nast Traveler'에서 '세계에서 방문 할 7 곳' 에 선정되면서 꾸준히 방문객의 발길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기서 주목할 만한 관점이 있다. 1960년대 나오시마의 남부를 개발하기 위해서 도쿄 소재의 리조트 개발회사가 진출하지만 이내 철수를 하게 된다. 눈앞의 이익이 보이지 않아서 였다. 그리고 지방의 그것도 작은 섬의 보수적 성향과 바램을 이해하지 못해서 였다.
그 후 10년을 이 장소에 주목해오던 후쿠다케 데츠히코는 단지 관광지로서 이 곳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교육을 접목한 장소로서 예술적 체험에 초점을 두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은 지역 주민들과 공유되면서 나오시마는 바뀌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 곳을 관광지로 생각하지도 않으며 관광지로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예전 부터 지금까지 그냥 그들의 삶터였다.
후쿠다케 데츠히코(福武哲彦)를 1986년에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그의 아들인 후쿠다케 소이치로(福武總一郎, 1945生)는 귀향을 하게 되고 나오시마 계획에 환경과 재생의 개념을 더하게 된다. 그는 선친의 뜻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메세지를 사회에 내어 놓는다. 로고에서 보여지듯이 사람이 주축인 CI를 도입하였고, 「있는 것을 활용하여, 없는 것을 만든다_在るものを活かし、ないものを創る」 라는 새로운 문명관을 주창하였으며, 예술,문화에 의한 지역 재생 활동을 구현하게 된다.
후쿠다케 소이치로는 나오시마를 「人生の達人であるお年寄りの笑顔があふれているところ_인생의 달인인 노인의 미소가 넘쳐나는 곳」으로 단언하였다. 상호를 베네세(Benesse_라틴어로 bene는 well, 그리고 esse는 being)로 바꾼이도 그다.
계획대로 1989년 국제 어린이 캠핑장이 오픈하였고, 안도다다오와 친분이 있던 소이치로는 건축가들과 예술인들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세토내해(瀬戸内海)의 작은 섬 나오시마(直島) 뿐만 아니라 데시마(豊島), 이누지마(犬島)를 포함한 12개의 섬과 다카마쓰항, 우노항 주변으로 트리엔날레(triennale)인 세토우치국제예술제(瀬戸内国際芸術祭, ART SETOUCHI)가 2010년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소이치로는 이 행사의 프로듀서다.
이 곳 나오시마도 일반적인 관광지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 섬 내 많은 음식점들이 늦은 시간까지 오픈한 곳이 없다. 오후 5시경이면 많은 경우 문을 닫는다. 그리고 비규칙적인 휴무는 여행객들을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월요일에 나오시마(直島), 데시마(豊島), 이누지마(犬島)에 남겨졌다면 본의 아니게 간헐적 단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먹을 수 있을때, 가능한 먹어두자.
이에(家) 프로젝트 시작부터 니시자와 류에(西沢立衛, 1966生)를 만나게 된다. 매표를 위해서 들러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농협 슈퍼마켓이었던 기존 건물이 새단장을 거쳐 Honmura Lounge & Archive로 바뀌었다. 외부는 많은 부분 원형을 보존하였다. 내부는 시골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도시 총각의 모습이다. 갑작스레 떠오른 이 느낌은 지금도 어머니께서 즐겨 애창하시는 곡을 상기하게 된다. 시골 외딴 섬마을 19살 섬색시가 사랑한 말쑥한 총각 '섬마을 선생님'. 다음에는 이 노래와 함께 시작해야 겠다.
카도야(角屋, Kadoya)는 이에(家) 프로젝트 중 처음으로 완성된 작업이며, 200년 된 이 가옥은 회벽과 훈연한 삼나무 그리고 전통지붕기와를 사용하여 건축가 야마모토 타다(山本忠司)에 의해 복구 되었고 미야지마 타츠오(宮島達男,1957生)의 작품을 볼 수 있다. 「Sea of Time '98」은 집안의 어두운 수조에 물을 채우고 발광 다이오드를 설치 하였다. 1~9까지의 숫자가 흔들리는 수면아래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 125명이 각각의 숫자와 변화의 속도를 정하게 하여 이 작품에 참여하였다.
카도야에서 동쪽 언덕을 오르면 호왕신사(護王神社_ごおうじんじゃ_Go'o Shrine)가 있다. 일어를 모르는 나로선 안내서가 여러가지로 헷갈린다. 문제는 발음이다. 호왕(護王) 이것은 ごおう(Go'o)로 발음나는대로 읽어 놓고 신사(神社)는 그 뜻을 번역하여 Shrine이라 적어 두었다. 우리는 한자음 대로 '호왕신사'라 읽던지 또는 호왕은 일본어 발음대로 '고오'라 읽고 신사는 한국식으로 읽어 '고오신사' 라 읽고 있으니 여러 모로 불편하다. 호왕신사를 'Go'o Shrine' 식으로 우리는 '고오신사(護王神社)'라 부르자.
에도시대에 세워져 노후화 된 작은 신사였던 고오신사(護王神社)는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 1948生)에 의해 2002년 복원과 개축이 된다. 여기서 스기모토 히로시는 고오신사의 기원을 아스카시대(7세기 무렵)로 까지 올려놓는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 홈페이지 에서는 에도시대라 하고 있으나 스기모토 히로시 본인의 홈페이지(https://www.sugimotohiroshi.com/) 일본어판에서는 아스카시대로 영문어판에서는 무로마치 시대로 기원이라 적고 있다. 모두 다른 기원을 얘기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고대부터 이어져 오는 신(神) 대한 믿음을 재현하였다고 한다. 신이 가진 힘의 영역은 거목이나 폭포 또는 바위에 깃든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오시마 근교에서 거석을 발견하고 24톤에 달하는 이 바위 덩어리를 신사 경내로 옮겨 지하 석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좁은 터널을 지나 만나게 되는 어두운 지하의 석실과 지상의 돌기단 위에 받들어진 본전은 지하에서 시작된 공학 유리 계단을 놓았고, 두 공간은 빛으로 연결되었다.
본전 앞의 배전(拝殿,はいでん)은 건축적 형식을 배제하고 작가적 심미를 가미하여 간소화 하였다. 스기모토 히로시는 이 고오신사에서의 작업을 적절한 비율 「Appropriate Proportion」 이라 명명한다.
작품을 설명한 그의 텍스트에서 컨셉의 근간을 이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좀 고집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건 쉽지 않고,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 또한 아니다. 물론 건축가의 작업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스기모토 히로시가 남겨놓은 텍스트는 자기 관점에 대한 고뇌이고 애정이다.
이시바시(石橋)는 센쥬 히로시(千住博,1958生)의 작업이 있다. 소금생산이 번성했던 메이지 시대부터 2001년 4월까지 이시바시 집안이 살았던 집을 2009년, 센쥬 히로시의 작품과 함께 둔갑시켰다. 센쥬 히로시는 동경 출신의 화가다. 15미터에 달하는 허공의 정원(空の庭)은 절벽이 화폭에 담겨있고 배경에 은(銀)을 사용하였다. 이 은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검게 변하기 때문에 시간이 작품을 변화시켜 볼 때마다 다른 작품이 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무상함을 시각화 「無常感を視覚化したもの」' 한 작업이다. 은의 사용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1658-1716)의 홍백매도병풍 「紅白梅図屏風」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홍백매도병풍에서 가운데 구비쳐 흐르는 흐르는 개울은 은을 입혀 검게 변한 모습이다. 5000엔의 뒷면 제비붓꽃은 오가타 고린의 작품이다.
이 작업에서는 주목할 만한 한 인물이 등장한다. 복원과 감수를 맡았던 아키모토 유지(秋元雄史,1955生) 이다. 그는 미술 평론가로 1991년부터 2004년까지 베네세(Benesse Corporation)재단에서 미술관 운영 책임자 겸 수석 큐레이터 였고 2004년 지중미술관이 개관하면서 관장과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Benesse Art Site Naoshima) 예술감독을 맡게 된다. 이후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관장, 도쿄예술대학 객원 교수와 미술관 관장을 겸임하고 2016년 부터 도쿄에 위치한 여자 미술 대학 예술 학부 특별 초빙 교수로 활동을 이어 갔다.
나오시마의 '이에(家) 프로젝트'에서 아키모토 유지가 감수를 하거나 공간디자인에 참여한 작업은 이시바시(石橋), 고카이쇼(碁会所,바둑기원), 하이샤(はいしゃ,치과) 이렇게 세 곳이다.
구라시키미관지구 내에 있던 오하라미술관이 있기 까지는 코지마 토라지로(兒島虎次郞, 1881-1929)라는 인물과 그를 알아 본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1880-1943)가 있었다면 나오시마(直島)를 예술의 섬으로 승격화한 후쿠다케 소이치로(福武總一郎, 1945生)에게는 아키모토 유지(秋元雄史)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이 점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