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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가 이영재 Jul 30. 2018

일본건축기행 2-12

다카마츠(Takamatsu, 高松)_1

[ 4 일차 ] _  원조 우동의 동네에서 만나는 재건 일본의 상징 단게겐죠(丹下健三)


어제 저녁 잔잔한 바다를 건너 다카마츠(高松)에 이르렀다.

이번 일본 건축 답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검색한 것은 우동(うどん)이었다. 지난 동경 건축답사에서도 프랜차이즈로 보이는 일반적인 우동을 먹었었지만 한국과는 다른 맛이었다. 그러니 사누끼(さぬき) 우동의 본고장인 다카마츠에서의 우동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축물을 보는 것보다 매 끼니 우동을 먹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누끼(讃岐,さぬき)는 가가와현의 옛지명이다."


급기야 '우동(Udon_2006)'이라는 영화까지 봤다. 먹거리를 주제로 한 영화는 많았다. 국내 영화로는 허영만의 만화 '식객'을 영화한 것이 대표적이지만, 일본 만화는 그 사례가 많다.

1994년 부터 <월간 PANJA>에서 연재되어 2012년 티비 방영을 시작한 <고독한 미식가_ 孤独のグルメ> 최근 시즌7을 방영하고 있으며 즐겨보는 드라마다. 그리고 최근 영화로는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 한 '리틀 포레스트'가 볼 만하다.

드라마, 영화 모두 영상보다는 소리로 보는 드라마, 영화다. 귀를 기울여 봐야 한다.


우동, 식객 그리고 고독한미식가
세토대교와 '우동의 나라 사누끼'의 간판과 영화의 한장면


담배 냄새로 찌든 호텔방에서 나와 체크아웃 전에 우선 단게겐죠(丹下健三,Tange Kenzo_1913-2005)가 설계한 카가와현 청사(현 카가와현 청사 동관_1958)를 보러 갔다.


단게겐죠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수상자가 없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al Prize)을 일본 건축가 최초로 1987년에 수상한 인물이다. 1913년 오사카 출생인 그는 동경대를 졸업하고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의 제자였던 마에카와 구니오(前川國男,Maekawa Kunio_1905-1986)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스승의 스승이었던 꼬르뷔지에의 건축언어에 영향을 받는다.


그 후 대학 교수시절 후미히코마키(槇文彦,1928生), 아라타 이소자키(磯崎新,1931生), 기쇼 쿠로카와(黒川紀章,1934-2007),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1937生)와 같은 선굵은 제자들을 길러낸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축이었던 메타볼리즘(Metabolism) 운동의 자문역할을 하며 힘을 실어 주게 된다.


단게겐죠(좌측, 중간) 우측:후미히코마키
아라타이소자키, 기쇼쿠로카와, 다니구치요시오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전후 부흥과 고도 경제 성장기에 맞물려 많은 국가적 프로젝트를 소화해내며, 일본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인지도를 높이는 건축가로 부상한다. 그 이전 단게는 히로시마 원폭 4일전 부친을 여의고, 원폭이 있던 날과 같은 날 실시된 이마바리시(今治市)공습으로 어머니 마저 잃게 된다. 이에 뜻하지 않은 영향으로 잔류 방사능 위험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 재건을 위한 책임자로 자청하여 현장을 조사하고 도시계획 업무에 종사하게 된다.


히로시마 재건을 위한 그의 노력의 여파는 1949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설계 공모에 당선으로 이어진다.


원폭으로 히로시마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리틀보이(little boy)가 투하되었던 지점에서 불과 380여 미터 떨어진 현재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에 세워진 히로시마평화기념자료관(広島平和記念資料館)은 일본의 전통과 서구 모더니즘을 조화시킨 단순하고 위엄있는 형태의 건물로 설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에서 부흥한 일본의 현대건축이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질 만큼의 상징성을 부여 받게 된다. 이 건물은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건물이 되었다. 그리고 원폭의 참상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당시 여론으로 사라질 위기에 있던 '히로시마 원폭 돔'을 랜드마크로 하는 도시 재건 또한 단게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당시 일본의 미국에 대한 감정을 간접적으로 들어낸 사건이 있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세워진 위령비에 얽힌 사연이다. 1950년 미국 태생의 조각가 겸 화가였던 이사무 노구치(イサム・ノグチ)를 만난 단게는 1951년 위령비 디자인 공모에 그를 참여시키며 지원한다. 그렇게 하여 선정이 되었으나, 키시히데토(岸田日出刀,1899-1966, 일본의 건축가)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무산되었다.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인의 손에 의한 것이 폭사자의 위령이 될까'라는 감정이 촉발됨으로 인해 이사무 노구치의 안의 기각되었다. 이후 단게가 위령비 디자인을 담당하게 되고 노구치의 안을 차용하여 현재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이사무노구치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내 재미 일본계 강제 수용이 발생하자 자진하여 애리조나의 일본계 강제 수용소에 지원 투옥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미국인이었던 이사무 노구치는 미국측 스파이라는 소문으로 일본인 사회에서 냉대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수용소에서 출소를 희망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일본인 이라는 명목으로 출소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예술가 동료였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청원에 의해 출소하게 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세워진 위령비 | 좌측: 이사무 노구치, 중앙: 노구치의 안, 우측:단게가 디자인한 위령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이 세워진 몇년 뒤인 1958년에 카가와 현 청사(香川県庁)는 지어진다. 켜켜히 쌓아 놓은 평면은 수평이 강조되었고 일본 전통 건축에서 보여지는 형태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옮겨 왔다. 단지 재료만 콘크리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옆 사각 격자 프레임으로 디자인된 높이 113미터의 신청사는 2000년에 완공 된 단게의 작업이다. 40여년 이라는 세월이 지나 새로운 요구로 수직성이 강해졌지만 기존 구관의 형태적 언어와 상통한다. 모두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과 같은 초기 디자인의 연장 선상에 놓고 있다.


단게 겐죠의 경우 이와 같이 외형적인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일관된 형태를 고수 하지 않고 발전하고 있다. 시기별로 그의 작품을 나열하고 보아도 각기 다른 형태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후반 작업에서 나타나는 마천루들은 그간에 보여왔던 모더니즘적인 성향을 벗어나서 포스트 모던의 경향이 나타난다.

70년대 까지 전통적인 요소를 삽입한 해석이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것 마저 사라지고 큰 볼륨의 격자만 남아있다.


80년대 말 홍콩 느와르의 재현, 시대를 초월한 촌스러움 ^^ㅋㅋㅋ | 사진 : 석정민


가는 날이 장날이다.

이미 지어진지 60년이 된 구관은 한창 공사중이다. 기초 하부에 면진을 위한 시공이 더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진이 한국보다 잦은 일본이고 현재보다 기술이 좋지 못했던 오래전 건물이라 상황에 맞추어 시행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럴때 맞춰서 왔을까.


카가와현청으로 향하는 일행들 그리고 멀찌감치 바라본 현청사. 하지만 공사중


휴일이라 문들은 굳게 닫쳐 어디 들어가 둘러 볼 시도도 못해 보고 그나마 하부도 안전팬스로 모두 가려져 불쑥 쏟은 부분만 바라보고 돌아왔다. 아쉽게도.

호텔로 돌아오기 전 카페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체크아웃과 함께 다카마츠 역으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차량으로 이동한다. 역근처 예약한 랜터카를 이용하여 나머지 장소를 둘러볼 계획이다. 무엇보다 랜터카가 지나가다 우동집이라도 있으면 세워놓고 한 그릇하기에 딱 좋지 않을까.


"다카마츠는 우동이다."


면진공사 진행 순서와 방법을 안내하고 있는 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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