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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해치 Aug 03. 2018

아를의 노란 집

빈센트 반 고흐의 1888년 그림

 고흐가 부푼 마음으로 아를로 떠날 당시, 파리는 이미 인상주의 화풍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특히 쇠라, 마티즈, 뤼셀베르그등이 대중으로 부터 사랑 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고흐는 아를의 작은 노란집에 자리를 잡 았죠. 어떻게든 그림을 팔아 테오의 자신으로 인한 부담을 덜어 주고 싶은 간절함을 가지고서.


 아를의 고흐 집에 고갱이 머물렀던 것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고갱은 약 두달여간 머물렀고, 싸웠고, 고흐는 빡쳐서 귀를 잘라 친한 매춘부에게 주었다고 하죠. (잘 간직해 달라는 말과 함께)


 고흐는 고갱을 좋아함을 넘어 존경했습니다. 고갱의 탈 문화적인 사고, 반 도시적 성향과 과감한 화풍은 고흐가 보기에 자신의 화가적 스페트럼보다 넓은 것이었고, 그러한 고갱을 자신의 아틀리에로 초대하여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한껏 고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끝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말았지만...


너무 달랐던 고흐와 고갱

 생각해보면 둘의 성향은 너무 달랐어요. 당시 고흐는 판매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키면서도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것을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고갱은 판매나 대중성 따위 관심 없었어요.(돈 많아서?)  오히려 더 순수한, 더욱 원초적인 무언가를 찾고자 했고 결국 타히티로 떠나게 되죠. (당시 고갱은 파리 문화를 혐오했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파리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도시인 것 같아요. 참고로 전 별로...)


 성격도 달랐고(고흐는 여리고 은근히 이타적이라고 하죠. 반면 고갱은 매우 직설적이고 직선적이었다고 합니다. 선호하는 주제나 화풍에도 차이가 있어서, 고흐는 밀레와 같은 농촌의 풍경, 농부의 정직한 생활등에 끌린 반면 고갱은 원시문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흐가 일본식 섬세판 묘사와 선묘에 흥미를 느낀 반면 고갱은 '그게 뭐야'라느 식이었죠. 어쩌면 두 사람의 파국은 예견된 것 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까지 심하게 그럴 줄이야 몰랐지만 말이죠.


고흐가 정말 좋아했던 노란 집

고흐의 살던 집은 노란집의 오른쪽에 있는 빌라였는데, 고흐는 네개의 방을 빌려서 아틀리에로 꾸몄습니다. 오른쪽으로 보면 다리와 철길이 보이죠? 그 앞에 작은 까페가 있는데, 거기서 고흐가 자주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밤의 까페'라는 그림에 나오는 까페가 바로 여기입니다. 

밤의 까페 테라스: Caféterras bij nacht 1888년 9월

 

 고흐는 이 집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고갱과 예술가로써의 동지애를 느끼며 하루 하루 즐겁게 작업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많은 좋은 작업들을 너에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찬 편지를 자주 보냈어요. 


호우시절: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짧고 고달픈 생을 살았던 고흐에게 이 집에서의 생활은 단비와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몇달 전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서 저 노란집을 보는 순간, 그가 얼마가 저 집을 좋아했는지, 그 애정하는 마음을 그림에 표현하고 싶어 했구나 라는 게 느껴져서 보고, 한 바퀴 돌고와서 또 보고, 다시 보고, 화장실 간 아내를 기다리며 또 보고 했었습니다. 


 주제도, 화풍도, 화법도, 비판의식 등등 좋은 그림에는 많은 조건이 있을 수 있겠으나,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만큼 좋은 그림은 없습니다. 소통하고 교감하기 위한것이 그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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