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다. 이번 주제는 아주 철학적이라구요.
몇 달 전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읽고 ‘오’하는 마음에 찍어온 글귀입니다.
맨 아래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그림은 우리의 적에게 대항하기 위한 공격적이면서 방어적인 무기이다.
단지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피카소는 이러한 그림들을 한창 많이 그릴 시기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게르니카(Guernica/1937년 작품)’가 있죠. 피카소는 이념에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나치의 공습으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대량으로 학살 당한 것에서 매우 큰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분노는 이 그리을 통해 세상을 향해 표현되었습니다.
그림에서 나치의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습니다만 죽은 아이의 시체를 안고 울고있는 여인, 활력을 잃은 황소, 망가진 칼과 함께 쓰러진 군인, 미친 말, 다친 말, 토막난 시체, 불타오르는 집의 모습이 입체파 양식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색의 사용이 배제되어 오히려 각각의 형태가 도드라지고 있죠. 마치 사진 앱에서 ‘흑백’필터를 씌우면 사진 속 인물의 표정과 심리선이 더욱 강조되는 것 처럼 말이죠.
피카소에게 있어 그림이란
1) 아빠가 시켜서 시작했다가
2) (너무) 잘해서 계속 했다가
3) 회화적 탐구심과 창의성을 폭발시켰다가
4) 내면의 심리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옮겨 갔다가
5) 다시 (모든걸 통달하고 나서) 회화의 본질로 회귀하는 모습을
평생에 걸쳐 보여주었습니다. (대단하죠... 보통은 1번에서 끝난다구요.)
이게 주제였죠. 저는 미생에서 저 문구를 봤는데요, 조치훈 9단의 말입니다.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캬)
사실 인간이 행하는 거의 모든 예술활동은 우리의 먹고 삶과는 관계 없습니다.
하지만 또 예술없이는 또 살 수 없죠. 하루 하루가 피폐해질테니까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과 비슷한 것 같아요. 사랑하면 보고 싶잖아요. 보면 막 기분 좋고 그렇죠.
그림도 보고 싶으니까 보고, 그리고 싶으니까 그리는 것 같아요. 거기엔 많은 의미가 있고, 사회적인 기능이 있고,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하지만 그 본질은 결국 ‘하고 싶으니까’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앞의 ‘무엇이’에 따라 그림의 성격이 달라지게 되는거죠.
이런식으로 말이죠:
예쁜 그림을 그리고 싶으니까 = 꽃꽃꽃 소녀 소녀 소녀 = 르누아르 (아니 그러니까 엄청 심하게 과장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저도 르누아르 좋아해요.)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을 표현해야 하니까 = 막 일그러진 하늘, 날카로운 비명, 곰팡이 = 뭉크
진솔한 농민의 근면함을 표현하고 싶어 = 감자, 장화, 촛불, 가족 = 고흐
완전 진짜 처럼 보이게 그려서 사람들이 ‘화법’이 아닌 ‘내용’에 집중 할 수 있게 하겠어 = 아예 붓터치 따위 없음. 완전 사진 처럼 = 하이퍼 리얼리즘
그림을 왜 그리냐면
그림을 왜 보냐면
그리고 싶고, 보면 좋으니까 겠죠.
대부분의 철학적 질문의 답이 다 이런식...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