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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뚜라미 Jul 28. 2023

세상에 나이스한 거절은 없다.

그러니까 그냥 당당하게 거절하자.

어릴 때부터 수다쟁이였던 나에게 누군가와 처음 말문을 트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럭저럭 적당한 소재를 잡아서 이야기의 물꼬를 트고 관계가 얕으면 얕은 대로 그 수준에 맞춰 공감하고 내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낯선 누구와도 특별히 벽을 세우지 않고 안면을 트고 대화를 시작한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거절을 잘 못 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누군가와의 시작이 쉽지 않고, 한마디를 내딛는 것에 신중한 타입이었다면 아마 상대방도 그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선을 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울타리가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지 꽤 많은 사람들이 불쑥 내 영역을 침범하고,때로는 무리한 부탁을 하기도 한다. 혹은 제안의 형식을 빌어 부탁을 강요한다.      


고요하게 지내고 있는 푸켓에서 한 아이엄마를 만났다. 우리 아이 수영수업을 받고 있는 곳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 딸아이는 세 살, 우리 딸은 (만 나이로) 여섯 살에 가까운 다섯 살. 아장아장 걷는 그녀의 딸과 곧 학교에 입학하는 우리 딸은 그냥 보아도 같이 놀 나이가 아니다. 수영 수업 중에 갑자기 메신저 연락처를 물어 와서 주었더니 그날부터 거의 집착에 가까운 플레이데이트 요청이 이어졌다. 당장 번호를 주고받은 그날 저녁 식사부터 주중 키즈 클럽 데이트에 주말 해변나들이까지. 눈만 뜨면 그녀가 매일같이 나에게 메신저를 한가득 보내왔다. 그 아기와 놀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내 딸의 생각과는 별개로 그녀는 중국인, 그녀의 남편은 러시아인이었고 내가 대화를 나누기에 딱히 편한 조건의 상대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애들 없이 그냥 어른들만 만나자고 했으면 매일밤 혼술 하는 나로서 약간 솔깃했을 수도 있지만 저녁 8시면 잠드는 우리 아이의 루틴을 깨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미취학아동을 하루 종일 돌봐야 하는 그녀의 처지가 너무 이해가 돼서 안쓰러운 마음으로 이해해보려 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겐 나에겐 없는 남편도 있고 애초에 가족 휴가를 온 건데 셋이 잘 즐기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집착적으로 플레이 데이트를 찾는지 조금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지난 금요일에도 주말에 뭐 할지 묻기에 예약해 둔 해변가 호텔에 간다고 했더니 그 해변으로 오겠다고 했다. 토요일 당일에 비가 오자 굳이 실내 놀이터에서 만나자고 제안하는 걸 보곤 아예 답장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호텔 키즈 클럽을 이용하면 되었고 일요일엔 호텔에서 내내 수영을 하다가 집으로 왔다. 그랬더니 또 메시지가 도착했다.   

   

‘just checking how was you and Ella, what’s the plan today?’   

  

그냥 영어단어이지만 just checking 이라는 단어에 마음에 화가 확 솟아올랐다. 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너에게 이야기하고 내가 매번 거절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자꾸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고 덧붙여야 하는지. 화가 나는 동시에 약간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소심한 나는 오늘 수영수업에서 그녀를 마주칠까 두려워 아이를 직접 데려가지 못했다. 헬퍼와도 입을 맞춰서 내가 전업주부가 아니라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많이 바쁘다고 전하기로 했다. 거짓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에둘러 거절을 하고 또 했던 건데 왜 내가 이렇게 당당하지 못해야 하는지 억울해졌다. 왜 선을 넘는 사람들은 엄청난 공격태세로 타인의 영역을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데, 내 공간을 침범당해서 당황스러운 방어자가 몸을 수그리고 거절의 방법을 찾아 헤매어야 하는 걸까.      


요 며칠 저 아이엄마의 끝없는 메신저 공격에 나는 마음 편하게 근처의 쇼핑몰도, 종종 들러 글을 쓰던 카페도 가기가 어려워졌다. 그곳에서 그녀를 무방비하게 마주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그녀의 세 가족을 보곤 나도 모르게 급히 노트북을 열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 번만 더 플레이 데이트 계획을 이야기하면 정말 솔직하게 ‘우리는 빈 시간이 딱히 없다고, 우리는 누구랑 따로 만나지 않아도 주중 주말이 꽉 차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아무리 입으로 연습을 해도 튀어나오질 않는다.  

    

그래도 수요일 수영 수업에는 당당히 아이와 함께 가려고 한다. 오늘 참석하지 않은 것이 무색하게 그녀와 딸아이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든 말든 남은 일곱 번의 수업에 나는 참석할 것이다. 비록 거절을 여섯 번 정도 했지만 나 나름대로는 정말 정교하고 세련된 기술로 열심히 에둘러서 거절의 뜻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믿는다. 더 이상 내가 그녀를 두려워서 피할 필요는 없다고 강하게 마음을 다잡아 본다. 솔직히 여전히 좀 떨리기는 한다. 너무 거절을 많이 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조금 있기도 하고, 그녀의 집착을 내가 키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얼마 전에 차승원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좋은 거 아님 나쁜 거지, 괜찮은 건 없다고. 괜찮은 척하는 거지 그건 나쁜 거라고.


내가 굳이 내 마음을 비겁하게 만들고 괜찮은 척해서 억지로 그녀의 가족과 어울릴 필요는 없는 거니까 좀 더 당당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너무 마음이 힘들었다.(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녀 덕분에 관계 맺음이 쉽고 거절이 어려운 불균형한 나의 성향을 다시금 잘 파악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누군가와의 시작을 조금은 예민한 레이더로 지금보다는 살짝 무겁고 신중하게  시간차를 두면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교훈 하나도 얻었다. 단출한 거절은 언제쯤 가능해질까.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거절의 마음을 전하는 게 쉬워질까.     


거절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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