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날을 세우고 있을때도 나는 마음의 용광로를 지핀다.
해외에 머물다 보니 언어가 모국어처럼 편치 않아서 인사말이나 안부를 묻는 스몰톡을 건너뛰고 다이렉트하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거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본론부터 쑥 들이밀게 될 때가 많다. 만약 내가 다른 문화권에서 지냈다면 매일의 일상 속에서 현지인들의 인사방식이나 톤앤 매너를 배워가면서 나의 화법이 조금씩 개선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홍콩에서는 걸어가다가 서로 어깨를 부딪쳐도 아무도 미안해라는 말을 하지 않고, 택시기사에게 아침인사를 건네도 무시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나의 직절적인 화법은 개선되지 않고 되려 한국에서보다 차갑고 무뚝뚝한 쪽으로 발달되었던 것 같다.
푸켓에 한 달 머물게 되면서 아이 학교와 쇼핑몰, 야시장 등을 몇군데 가보았는데 태국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많이 없었을 뿐더러 태국 사람들이 프렌들리 하다는 인상을 특별히 받지 못해서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그저 내가 소비하는 것과 지불하는 비용에 대해 정당한 댓가만 안전하게 받을 수 있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굳이 특별히 정을 쏟지 않고 머물다가는 도시려니 하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하게 마사지 샵과 슈퍼마켓에서 정말 친절하고 맑은 웃음을 마주하곤 마음주름 사이에 켜켜히 쌓였던 더러운 먼지가 싸악 씻겨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고급 마사지샵이어서 수십명의 직원이 도착부터 마사지 끝날때까지 끊임없이 몸을 숙이고 조심스럽게 의전하는 것은 그다지 인상깊지 않았다. 비용을 다 지불하고 나와서 택시를 기다릴 때 그 친절한 아지매가 갑자기 큰 파라솔을 들고 내 옆으로 달려왔다. 택시 번호가 뭐냐고 묻기에 알려줬더니 자신이 번호를 보고 택시를 찾아줄테니 나보고 잠시라도 들어가서 쉬고 있으라고 했다. 마사지 받는 내내 사실 좀 추워서 그냥 밖에 있겠다고 했더니 내 옆에 서서 조금이라도 나에게 뜨거운 볕이 올까 두리번 거리며 파라솔을 고쳐들었다. 1분 후 택시가 도착한다는 알람을 받고는 계단 밑으로 먼저 내려가 있으려고 했더니, 아지매는 나에게 하얀 얼굴이 타면 안 된다고 손을 연신 내저으며 택시로 먼저 뛰어내려갔다. 택시가 도착해서 본인이 우회하기 편한 방향으로 서있자 아지매는 택시 기사에게 내가 편히 탈수 있게 차를 돌리라고 대신 부탁해줬다. 택시가 출발하고 우리가 꽤 멀어졌을때까지 아지매는 한자리에 서서 내내 손을 흔들며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마치 염원을 외듯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그녀의 행동은 단지 샵에서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곳을 찾아준 고마운 손님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하는 것, 그리고 따뜻한 웃음으로 최선을 다해 마지막 배웅을 하는 것이 마치 소명처럼 보였다. 가격에 비해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던 마사지가 그 아지매의 꾸며내지 않은 웃음과 따스한 진심으로 다 잊혀졌다. 그녀가 양팔을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창문을 내려서 ‘Really appreciate you kindness.. have a nice day!!!’ 라고 크게 소리치게 되었다. 그리고 콘도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그 아지매의 해맑은 웃음을 떠올리며 ‘나도 사람들에게 매 순간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라는 뜨거운 마음이 솟는걸 느꼈다.
그리고 주말에 슈퍼마켓에서 또 다시 마주한 친절한 캐셔 아줌마. 당장 다른 목적지로 출발해야하는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황급히 가장 싼 우산 하나를 골라 계산대로 갔다. 빨리 계산을 마치고 길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캐셔아줌마의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계산을 마치 후 우산 비닐을 좀 버려달라고 부탁하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데 아줌마가 뒤에서 나를 부르며 쫓아왔다. 지금 당장 쓸 거 같으니 우산에 달려있는 상표 태그를 잘라주겠다며 가위를 가지고 달려온거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아줌마 얼굴을 쳐다봤다. 문화도, 언어도, 삶의 환경 모든게 다르지만 그녀의 얼굴에선 우리창구 팀장님의 연륜 같은, 찐 워킹맘의 짬바가 느껴졌고 굳이 베풀지도 않아도 될 친절을 나누려 나를 쫓아온 그녀의 모습이 참 멋져보였다. 단돈 89바트(원화 2천원) 정도밖에 안하는 우산 하나 였을 뿐인데 그냥 몸에서 우러나온 대가없는 친절과 그 마음씨가 왜인지 모르게 부러웠다. 얼마나 이타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면 손길 하나, 행동하나에 저런 친절이 깃드는 걸까. 나와 내 가족 위주로 그냥 수지타산에 맞게 지내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두 아지매가 보여준 친절은 어찌보면 별게 아닐수도 있지만 짧은 찰나에 나는 놀랐고, 감사했고, 스스로를 돌아보기까지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여운이 참 크게 남았다. 아무리 현실이 각박하고 mz니 뭐니 손해보는 건 절대로 안하려는 세대가 등장하고, 챗 gpt처럼 사람보다 뛰어난 AI가 온 세계를 뒤덮고 있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전달하는 온기는 그 어느때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 같다.
홍콩살이 몇 개월만에 잘 웃지도 않고, 길거리의 사람들을 죽어있는 배경처럼 대하는 무뚝뚝한 모습의 내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나를 스치는 사람들에게는 좀 더 친절하려고 노력하려 한다. 그냥 친절해서 좋다_ 로 끝나지 않고 나의 친절함이 다른 누군가에게 따뜻한 온기가 되어 더 많은 불씨를 지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남은 푸켓 일정동안 좀 더 많은 불씨를 모아서 나의 집으로 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