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걷든 뛰든 그건 중요치 않아.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내 딸아이도 무언가 시합하는 걸 참 좋아한다. 밥을 잘 먹지 않다가도 누가 빨리 먹는지 내기하자고 하면 갑자기 고봉밥을 퍼 올려서 꿀꺽 꿀꺽 씹어 넘긴다. 걷기 싫어서 미적거릴 때 누가 저기까지 일등으로 달려갈까? 라는 말 한마디면 갑자기 경주마가 되어 짧은 다리를 종종거리며 내달린다. 그런데 뛰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아빠 2등, 엄마 꼴찌!’ 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승리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드러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딘가에 부딪칠까 걱정이 되어 걷거나 뛸 땐 뒤를 보지 말라고 급하게 소리친다. 수없이 이야기를 했지만 아이는 매번 뒤를 돌아 레이스의 순위를 체크한다. 또 다시 내가 외친다. ‘뛸 때는 뒤에 보는 거 아냐. 앞만 보고 너에게 집중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것이 아이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아서 약간 내용을 바꾸었다. 뒤돌아보는 시간에 다른 사람이 너를 앞질러서 갈지도 모른다고. 지고 싶지 않으면 그냥 앞만 보고 뛰는게 성공률이 높다고. 그런데 나도 어린 시절 딸아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 한번은 경기도 도대표를 뽑는 수영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나의 종목은 배영이었다. 사실 배영을 하고 싶어서 한건 아니고 선수들에게 종목별로 토너먼트를 시켜서 기록 순으로 선생님이 배정해 주신 거였다. 배영은 앞과 옆을 볼 수 없어서 너무도 답답했다. 시합이 시작되었고 나는 최대한 속력을 내는 동시에 옆 라인 의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빠른지, 어느 지점을 지나쳤는지 파악하고 싶었다. 그런데 양 옆에서는 물이 튀지도 않았고 발차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가 제일 뒤쳐진 것 같아 이왕 꼴찌가 된 거 적당히 하자고 몸에 힘을 뺀 순간 누군가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의 성적은 3위였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스타트는 일등이었다는 걸. 코치 선생님과 부모님은 나에게 왜 갑자기 속도를 줄였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경쟁자인 누군가들을 극도로 의식해서 나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그 순간 추월당했던 것이었다. 정확히는 지레 나의 능력을 과소평가 했던 탓에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포기했던 것, 그것이 패인이었다.
그날 이후 종목을 평영으로 바꿔달라고 코치 선생님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이상하리만치 내 기록은 배영이 제일 좋았다. 시합이 아닌 일반 기록 측정 시에는 옆 라인을 의식하지 않고 내 속도에만 집중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눈은 천장을 향하고, 귀는 물속에 잠긴 채 고요하게 내 팔과 다리만 힘차게 흔들었을 때 나는 최고의 기록을 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 속에서 타인을 아예 의식하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내가 어떤 목표나 꿈을 가지고 스퍼트를 낼 때 만큼은 그 중심에 경쟁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놓여있어야 한다는걸 살면서 여러번 느꼈다. 선의의 경쟁은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의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순간의 경쟁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삶을 더 건강하게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나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끌어올려진 대체 불가능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내가 나에게서 발견해낸 신념, 믿음, 꿈만큼 강력한 경쟁자는 없다. 꺾이지도 않고 우두커니 나를 붙잡아줄 나의 버팀목이자 무기.
남들과의 소모적인 경쟁과 비교가 나에게 큰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니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도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워졌다. 주변을 응원하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힘이 되었다. 잘 되는 사람을 보면 배가 아픈 게 아니라 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도 그 힘을 내 안에서 찾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나를 일으킬 욕망이 무엇인가 뒤적거리다 보니 소중한 나의 가족과 소수의 가까운 지인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용기가 샘솟고, 격려 받는 것 같은 그들과의 연대, 우리가 각자 간절히 꿈꾸는 것들이 이루어 질 날이 올 것이라는 공동의 믿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과정의 끝자락에서 다함께 참을 수 없는 뿌듯함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따뜻한 이 인연들과 함께 곱게 반짝이며 나이들 거라는 상상.
이런 글을 쓰며 여러 친구들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자꾸만 추가된다.
더 이상 나에게 경쟁이나 비교는 필요하지 않다. 낮 시간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걷고 뛰다가 저녁 무렵 ‘오늘 잘 보냈어? 너의 하루는 어땠어?’ 라고 물으며 삶을 위로해줄 수 있는 마음들이면 충분하다. 내가 만들어가는 작은 행복의 세상이 친구의 세상과 잘 어우러져서 더 예쁘게 빛났으면 좋겠다. 멋지고 잘난 친구가 있으면 그대로의 행복을 빌어주고, 또 힘든 사람이 있으면 다 같이 영차하며 어두운 수렁에서 끌어내어 주고. 행복 총량의 법칙을 나누고 더해서 다 같이 잔잔하게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그게 성공한 게 아닐까. 나의 주변이 행복치 않은데 나 혼자 고개 뻣뻣하게 들고 행복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딸아이에게 더 분명히 말해줄 수 있다. 남들이 걷든 뛰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수많은 남들 중에서도 너와 같이 속도 맞춰서 걸어줄 사람도 있고, 뛰어줄 사람도 있으니 자꾸 뒤돌아보며 누군가를 앞지르려는 마음은 버려도 괜찮다고. 내일 등원시간에 아이가 또 뒤를 보면서 뛴다면, 너의 뒤에는 아직 팔팔한 엄마가 있으니 걱정스러운 것이 있더라도 훌훌 버리고 그냥 앞을 보고 열심히 너의 걸음을 옮겨도 괜찮다고 말해줘야겠다.
이제 경쟁은 그만하고 싶다.
사실 경쟁의 레이스에서 제쳐진지도 오래지만 간혹 마음으로 비교하고 의식했던 것 자체도 그만두고싶다. 나는 나 자체로 뚜벅뚜벅 잘 걷는 온전한 인간이다. 내가 밝은 길로 잘 나아가고 있음 그뿐이다. 내일도 나는 나의 루틴대로 나의 믿음대로 행복하게 뛰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