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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Nov 03. 2020

가을, 너마저도.

코로나 시대, 50개의 단상 (21~30)

코로나시대, 50개의 단상을 정리하는 백일 프로젝트 중 3번째 글.


21. 5도권(Circle of Fifths)

“5도권을 아시나요?”

마치 도를 아시나요?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 피아노 선생님이 화성학 책을 열고 둥근 표를 보여주었다. 매혹적인 동그라미다. 게다가 5도권이라니 무슨 흑마술 같고 주술 같은 신비로운 이름이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들었다. 역시 사람은 뭐든 배워야 한다.

한편, 나는 여전히 피아노 선생님의 얼굴을 모른다. 코로나 시대에 시작된 교습이라 마스크 위의 모습만 봤다. 눈이 예쁜 분인 것만 알겠다. 우리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두 평 정도의 작은 방음실에서 수 주를 보냈다. 이 또한 신기한 경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낯선 전쟁), 여행의 법칙/아이웨이웨이

22. 전시장

코로나 시대 또 하나의 변화는 전시와 공연 가뭄. 취소도 많이 되고 관람도 어렵고... 미술관을 사전 예약하라니 참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제 그것도 마스크 일상처럼 뉴 노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예약제로 운영되니 한산해서 좋다. 인기 있는 시간대인 야간개장이나 주말도 혼잡하지 않다는 것이 장점. 마스크를 끼고 흘러 흘러가며 전시를 본다.

23. 거리두기 공연

임동혁&트리니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관객도 오케스트라도 마스크를 쓴다. 그래도 공연은 계속되니 다행이다. 이번 공연에선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지휘자와 관악기, 피아노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지지난 달이었나 서울시향 공연은 지휘자도 마스크 쓰고 관악기 쪽엔 차단막 세우고 연주자 간 1.5미터였는데 요즘은 약간 완화된 듯.

거리두기 공연이 시작된 뒤로 커플 관객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원래 클래식 공연 오면 소개팅(&선)으로 만난 지 서너 번 된 느낌의 초기 커플이 데이트 복장으로 빼입고 온 것 같은 케이스가 늘 눈에 띄었는데. 코로나로 한 칸씩 띄어 앉아야 하자 데이트 코스로의 매력이 반감된 걸까.

거리두기 관람의 장점은 역시, 쾌적함. 옆좌석 사람 때문에 관람에 방해받을 가능성이 거의 0으로 떨어진다. 물론 주최 측의 현저한 수익성 악화를 생각하면 마음이 좀 씁쓸하다. 이 쾌적함도 때의 추억이길 바랄 뿐.

24. 영화도 계속된다.

일주일 사이에 미술관, 공연장, 영화관을 연이어 오니 이제 좀 1단계가 실감 난다. 아직 곳곳이 소독과 신원확인, 거리두기지만 그래도 뭔가 굴러간다. 영화를 개봉날 보러 가는 걸 좋아하는데, 올해는 기대작들도 나오지 못하고 개봉행사도 없어서 영 섭섭하던 참이었다. 마침 기다리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개봉일이 확정되어 개봉 첫날에 달려왔다. 귀엽고, 정말 귀여운 영화다.

영화에서 고군분투하다가 해피엔딩을 맞는 90년대 주인공들. 하지만 2년 뒤에 IMF 사태라는 것을 스크린 밖의 관객들은 알고 있다. 천진하게 웃고 진급을 향해 달려가지만 고졸 여직원부터 해고 쓰나미에 휩쓸릴 것이라는 것을. 앞으로 201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저들은 몇 년 뒤에 코로나로 온 도시가 다 중지될 것을 알까? 지금이 노력이 물거품이 될 걸 알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코로나의 2020년을 또 하루 보냈다.

25. 가을꽃

가을은 빛이 정열적이다. 하늘도 그렇고. 그래서 그런가. 가을꽃은 곱디고운 봄꽃보다는 투박하지만 섬세하다. 봄꽃 축제가 코로나로 줄줄이 취소된 것이 엊그제 같기도 하고 먼 옛날 같기도 하다. 코스모스 하늘 거리던 시간도 금방 지나고 이제 낙엽도 진다. 내년 봄 꽃도 마스크를 끼고 맞이하겠지. 그래도 계절 오고 가는 건 여전하니 다행이다.

26. 마스크는 쓰고 있지만

모처럼 세종문화회관 공연. 마스크는 쓰고 있지만 이제 사람들과의 거리는 좁아지는 기분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와글와글한 분위기를 곳곳에서 만난다. 이제 마스크는 그냥 옷 입듯 당연히 입고, 문진표 작성도 물 흐르듯 하게 된다. 이것이 새로운 질서구나. 백신이 보급되어야 끝이 날. 관객 입장에선 좋지만 공연계가 거리두기 공연 때문에 적자가 심하다는 얘기가 반복해서 나온다. 빠른 미래에 좀 완화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27. 제주의 활기

제주는 아직 늦은 여름이다. 해수욕장도 코로나 때문에 조기 폐장했고 비수기에 접어들 시기지만 아직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따뜻했다. 곳곳이 조용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해외에 나갈 수 없는 그 많은 여행족들이 다 어디를 가겠나. 직장인들은 휴가가 남았을 터이고 요란하지 않아도 산으로 바다로 많이들 움직이기 시작한다. 완전히 자유롭진 않아도 그래도 이어지는 일상이다.

28. 벨루가

모처럼 아쿠아리움을 갔다. 하얀 고래 벨루가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희고 우아했다. 부드럽고 단단해 보였다. 여유롭고 슬퍼 보였다. 고맙고 미안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무언가가 아름다워서 오래 쳐다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29. 감정은 축축

뜨거운 햇살을 받으면 우울한 감정은 대부분 말라서 날아가는 느낌이다. 우울한 마음은 원래 습기 찬 것이기 때문일까. 날씨가 추워지면서 조금씩 가라앉아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주의 태양 아래서 바싹 말린 뒤에 알게 되었다. 좀 축축해져 있었던 것을. 서울로 돌아오니 다시 춥다. 겨울 옷을 꺼냈는데 주머니에서 마스크가 나온다. 그래, 지난겨울에도 코로나였지. 그 생각을 하니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계절이 세 번, 네 번 지나도록 아직도. 이번 겨울도 여전히 축축하려나.  

30. 마지막 잎새

비가 조금 왔고, 낙엽이 떨어졌다. 가을도 금세 지나가는구나 싶어 초조해진다. 봄꽃이 지는 건 아쉽지만 여름이 오니까 좋은데, 낙엽이 지는 건 그저 섭섭하기만 하다. 한참을 기다려야 다시 봄꽃이 핀다. 정말 한참이다. 오륙 개월은 기다려야 해. 그때쯤에 백신은 나올까. 잘 지내고 있었는데, 마음이 아주 조금 지치려고 한다. 이번 겨울은 아무래도 꽤 길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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