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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Nov 27. 2020

겨울이 길고 춥겠구나.

코로나 시대, 50개의 단상 (31~40)

코로나 시대, 50개의 단상을 정리하는 백일 프로젝트 중 4번째 글.

31. 다시 합창

비록 임시 연습실에 제한 인원이었지만, 합창 연습이 재개되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유료 합주실을 빌렸다. 홍대에 있는 합주실이다 보니 음악 하는 젊은이(!)들이 오갔다. 에휴, 다들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다. 요즘은 모여서 연습할 곳도, 공연할 곳도 모두 마땅치 않겠지.

마스크와 거리두기, 그리고 현장 생중계로 합창 연습이 시작되었다. 오래 쉬었더니 어이없을 정도로 음 잡기가 힘들었다. 역시 보통 사람의 음감이란 이 정도구나 싶어서 약간 좌절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그래도 소리가 만나서 섞이는 거 좋았다.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기쁨. 같이 노래하는 기쁨이 이런 거구나.

32. 가을산

묘한 느낌을 주는 수형의 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는 정원을 방문했다. 안도 타다오 설계의 뮤지엄 산. 제임스 터렐관도 정상운영 중이었다. 물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며 하늘을 비춘다. 곳곳에 사각으로 펼쳐진 물이 좋았다.

평일이었음에도 사람들이 적당히 많았다. 마스크 외에도 코로나로 변한 게 한 가지 있었다. 문자가 극도로 절제된 편이었던 박물관 안 밖이, 코로나 관련 안내문과 배너로 조금 오염된 것. 문자가 없는 미니멀한 전경이 디자인의 일부였던 공간이 다소 복잡하게 느껴졌다. 요란하지 않아서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만 섭섭했다. 글자는 소리를 내지 않아도 소란하다.

33. 컵의 이

아끼던 르쿠르제 컵의 이가 나갔다.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위치다. 모른 척하고 입술을 대어 보지만 회피할 수 없다. 묘하게 입 한구석에 닿는다. 겨울에 쉽게 식지 않는 컵이라 좋아했었는데 보내줘야 하나보다. 겨울, 드디어 코로나 확진자 300명대 시대가 돌아왔다. 며칠 따뜻하더니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겨울이 길어지겠구나 싶다. 한 번 넘겨봤으니 두 번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다. 다음 겨울 컵은 머그 대신 보온 스테인리스를 쓰기로 했다. 잘 지내보자 겨울.

34. 옆 바다의 거북이

4년 전 오늘이라고 뜬 사진에 마음이 흔들렸다. 오키나와였다. 바닷속을 보는 걸 좋아하는데, 언제가 될 수 있을까. 제주도 나쁘지 않겠지만 거북이는 볼 수 없으니까. 언제나 마음이 좀 편하려나. 전 세계의 리조트와 해변들은 요즘 어떠려나 모르겠다. 당연히 고요하겠지. 오염된 지역의 자연은 좀 숨을 돌리고 있을 테지만 관광지 사람들의 생계는 어떻게 되고 있을지... 요즘엔 굳이 외신을 찾아보지 않는다. 한국, 아니 서울만 벗어나도 현실감이 없다. 원래도 멀던 세계가 더 멀게 느껴진다. 주말에 가방 하나 메고 공항으로 갈 수 있었던 때가 서늘하게 그립다.

35. 낙엽도 지고

그럴 줄 알았지만 가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불광천의 다리를 건너다가 말라가는 잎과 나뭇가지 끝자락을 가만히 쳐다봤다. 물도 하늘도 바람도 멈춘 듯 고요했던 오후였다. 날은 춥고 확진자는 늘어가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 많아. 나중에 코로나 시대 '덕분에'라고 생각할 일들도 차곡차곡 쌓여간다.

36. 세상의 양면

날씨가 흐리다고 불평했는데, 막상 산을 오르니 구름에 덮인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홍천 팔봉산. 거친 암산을 오르다 보니 오르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흐린 날씨 덕에 경치도 좋고 선선해서 다니기 좋았다. 역시 세상일엔 다 양면이 있는 법이다. 다시 확진자가 늘어나는 오늘의 세상에도 양면이 있기를.

37. 북쪽의 끝

연천군 한탄강 주상절리. 연천군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의 일부. 혼자 멀리도 갔고 많이도 걸었다. 북쪽의 끝과 같은 곳. 아무도 없고 많은 것이 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길이 아름다워서 좋은 날이었다. 북한은 여전히 코로나 청정지역이려나.

그러고 보니, 한 달 사이 많이도 돌아다녔다. 평생 처음 가본 곳들도 있었고, 재방문인 곳도 있었고, 혼자였던 적도 함께였던 적도. 이 정도만 다닐 수 있어도 좋을 텐데, 확진자 추이를 보니 12월은 이 정도 다니는 것도 힘들겠다. 설악산의 눈을 보고 싶었는데 가능할까.

37. 달콤한 것들.

볕이 잘 드는 주말이었다. 단 것과 갓 내린 커피를 나눴다. 코로나 확진자수가 빠르게 늘고 있다. 외부 활동을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주변 확진자 소식이 들리고 있다. 점점 조여 오는 것이 느껴진다. 자영업자들 요즘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고 있다가 다시 갑갑하겠구나 싶다. 이게 복구가 될까. 언제나 될까. 서비스직은 대량 실업자를 양성중이고 부동산과 주식에 돈이 몰린다는 소식만 전해져 온다. 모든 괜찮은 걸까. 백신 후 돌아올 일상은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잘 상상이 안 된다. 일단은 달콤한 것들을 먹었다. 미리 생각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38. 골프장은 건재하다.

모처럼 골프를 쳤다. 후반에 가벼운 내기를 했다. 골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동행이 내기라니까 뭔가 좀 긴장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동행은 마음 편해졌는지 매홀 적극적으로 승패를 즐기기 시작했다.

"내기를 했더니 긴장감도 있고 모든 홀에 의미가 있네요."

모든 홀에 의미가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매 순간 의미를 가지려면 긴장이 필요한 걸까. 의미가 있으려면 뭐가 필요할까 생각하면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길을 걸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골프장 회원권이 올해 많이 올랐다고 한다. 해외로 많이들 못 나가고 술자리 접대 등도 어려워지면서 사교생활과 운동장소로 골프가 각광을 받다 보니 부킹이 크게 어려워졌다고. 골프장도 어려움을 겪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보다.

39. 밀 키트의 시대

확진자수가 500명대에 접어들었다. 이러다 다시 1 천명대를 보는 게 아닌가 싶어 졌다. 외식하기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다. 외식도 어렵고, 배달 음식도 지겨운데 해 먹기는 번거롭다. 그럴 때 종종 밀 키트를 주문해본다. 지난번에 마라샹궈 밀 키트에 도전해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번에는 검증된 밀푀유 나베 밀 키트를 주문해보았다. 간단하고, 생각한 대로의 맛이다. 밀 키트 종류가 좀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세련된 거 말고 그냥 좀 평범한 음식도 다 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 집에서 먹는 끼니가 늘다 보니 처음부터 재료 다듬어서 끼니 챙기는 게 힘들다.

40. 춥다.

이제 완연한 겨울이다. 롱 패딩 꺼내 입어야 하고 따뜻한 국물요리가 생각난다. 가을엔 달리러 나가기가 좋더니, 조금 추워지니 이제 달리러 나가기가 무섭다. 러닝화를 신고도 한참을 망설인 끝에 뛰러 나갔다. 막상 뛰니까 뛸만했다. 몇 킬로 뛰니 덥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목표를 달성하고, 스스로를 칭찬해주었다.

확진자는 늘고 백신 뉴스는 나오지만 좋은 소식은 크게 들려오지 않는다. 이 겨울, 길고 춥겠구나 싶다. 추워도 눈 딱 감고 뛰러 나가야지. 달리다 보면 생각도 사라지도 몸도 따뜻해질 거야.



이제 마지막 10개의 사진이 남았다. 밝고 즐거운 얘기만 남기고 싶지만, 한동안 춥고 춥겠구나 싶기만 하다. 그래도 좋은 얘기들도 잊지 말고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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