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i Dec 31. 2020

끝이 났다

코로나 시대, 30개의 단상 (41~50)

코로나 시대, 50개의 단상 (31~40)

코로나 시대, 50개의 단상을 정리하는 백일 프로젝트 중 마지막, 다섯 번째 글이다. 이 사소한 100일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 라섹수술을 했다. 몇 주간 눈이 잘 보이지 않아 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주로 사진을 올리고 단어 정도만 메모해두었다. 덕분에 브런치에 정리도 미루고 있었다. 아직도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2020년이 지나기 전에 작성 버튼을 누르겠다는 마음으로 모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리했다.


41. 군남 홍수조절지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북진. 홍천군 군남 홍수조절지. 먼 길을 혼자 운전해서 갔고 적막한 길을 혼자 조금 걸었다. 여기는 벌써 바람도 하늘도 얼어버린 것 같다. 모든 걸 마무리하는 시기. 올해 걷기 여행도 마지막이다. 추운 날이었고 바람도 매서웠다. 북쪽으로 갈 때마다 코로나는 잊게 되는데, 다른 것들도 다 잊게 되는 기분이다.


42. 유능한 초보 러너

30분 달리기에 성공했다. 평생 달리기를 무서워했는데, 걷기 프로젝트의 성공에 힘입어 런데이와 함께 8주 프로그램을 완료한 것. 달리기는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자전거 타기처럼, 일단 굴러가기 시작하면 그냥 가게 되는 관성이 있다.  

이 역시 굳이 말하자면 코로나 시대 덕분이다. 다른 놀 것과 사교생활들이 풍부했다면 혼자 달리기를 꾸준히 할 의지를 다질 수 있었을까.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이제 30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유능한 초보 러너가 되었다. 내년쯤엔 하프 마라톤을 꿈꾸는 유능한 중견 러너로 거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43. 갑자기 라섹수술

갑자기. 정말 갑자기 라섹수술을 다짐했다. 어차피 날씨도 추워지고 코로나 확진자도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마스크를 하고 달리기를 하면서 안경에 김이 서리다 보니 운동과 안경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고. 수상스포츠를 하면서 매번 불편했던 기억이 났다. 더 나이 들기 전에 가능한지라도 알아보자 싶었다.

안과에 가서 수술이 가능하냐고 하니 가능하다고 해서 다음날 수술하러 가겠다고 했다. 코로나 상황을 보니 다른 걸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이제 올해 여행도 대충 마무리된 것 같으니 이 기회에 하자 해! 하고 예약해버린 것. 그렇게 결심 하루 만에 수술을 했다.

수술실 앞에서 마취약을 넣고 대기하면서 강소라를 쳐다보았다. 한참 쳐다보았다. 그제야 좀 무서워졌고, 집에 가고 싶어지기도 했다. 수술은 외롭고 쓸쓸한 일이었다. 라섹수술은 소문대로 아팠다. 어떤 일들은 온전히 혼자 견뎌야 한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날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엉엉 울면서 돌아왔다.


44. 안 보인다.

시력이 놀라운 정도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루 3번 넣어야 하는 약이 어떤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병원에서 3번, 6번이라고 써주었는데 그게 보이지 않았다. 눈이 보였다 말다 했다. 그래서 결국 눈이 좀 보이는 순간에 크게 적었다. 3번, 6번, 4번.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설명서 같을 걸 읽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노인 대상으로 깨알 같은 약관이나 계약서 내미는 사람들은 모두 굉장히 나쁜 사람일 것이다.


45. 오디오북의 시대

눈이 안 보이니 오디오북을 들었다. 가벼운 문자 중독이 있어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시간이 고통스러울 걸 미리 알았다. 그래서 라섹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준비했다. 윌라 오디오북을 1개월을 신청하고 미리 책을 찜해두고 다운로드하여둔 것. 덕분에 거의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앱에서 대충 메뉴를 짐작해서 오디오북을 틀 수 있었다. 스스로의 준비성과 선경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간 10권쯤 들었다. 홀로 어두운 방에 누워서 스피커만 바라봤다. 일곱 시간 여덟 시간씩 책을 듣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만, 책 내용에 대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뭔가 메모하고 싶은데 그걸 할 수 없는 게 슬펐다. 심지어 컴퓨터를 열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모니터를 향해서 감상을 적기도 했다. 한타인지 영타 인지도 잘 구분이 안 가는 상태인데도 그랬다. 읽는 것, 쓰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집착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46. 그래도 밥은 잘 먹는다.

확진자는 다시 늘어만가고 라섹수술로 여전히 글쓰기는 어려운 상태. 그래도 시력은 많이 돌아왔다. 여전히 글씨는 잘 안 보이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요리를 하고 창밖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모든 것들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다른 종류의 감각이 발달하는 기분이다.


47. 식물을 본다.

눈이 잘 안 보이고 글을 읽지 못하면서 감각이 묘하게 발달하는 것이 신기하다. 집안의 식물들의 상태가 눈에 잘 들어온다. 식물들을 좀 만져주었다. 가지도 조금 치고 잎도 다듬었다. 주변의 색깔과 공기와 물건들이 말을 거는 기분이다. 눈이 잘 보일 때 문자에 정신 팔려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기분이다. 


48. 자꾸 산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눈까지 안보이니 홈트레이닝에 진심이 되었다. 진정한 요가인이 된 것 같은 심정으로 요가복을 사고 있다. 요가복에도 다양한 품질이 있으며 요즘은 기능도 여러모로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 그게 그거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아니더라. 그렇다. 이것은 자꾸 이 핑계 저 핑계로 러닝복과 등산복, 요가복을 사대는 자의 변명이다. 사교생활에 필요한 옷에 관심이 줄었더니 이게 엉뚱한 데로 불똥이 튄다. 머리는 그만 사라고 하지만, 손가락이 산다. 손가락의 탐욕일 뿐, 내 죄는 아닌 것 같다. 

 

49. 엽서

한 달 전, 종이박물관의 느린 우체통에 넣은 엽서가 도착했다. 잊고 있다 받은 엽서라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동행이 적은 짧은 편지글을 보고 겨우 기억이 났다. 낙엽이 지던 좋은 가을날이었다. 유난히 많은 택배와 배송을 현관 앞으로 받는 요즘, 우체통에 꽂혀있던 손글씨 엽서 한 장, 좋은 느낌이었다.


50. 끝 

드디어 100일이 끝났다. 코로나 시대를 100일간 기록하고 있다 보면 그 사이 뭔가가 크게 변해있을 줄 알았는데, 특별히 변한 건 없었다. 변한 건 확진자수가 크게 늘었다는 것 정도. 이렇게 백일을 더 보내고 더 보내도 달라지는 건 확진자 규모밖에 없는 건 아닐까. 확진자가 최근 1천 명을 기록했다. 수도권 확산 규모가 어디까지 갈지 아직 짐작하기 어렵다.

백신 소식이 들려온다. 아직은 모르겠다. 내년은 어떠려나. 갑자기 모든 게 해결되고 멈춰있던 세계가 다시 굴러가는 기분은 어떨까. 축제처럼 사방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 이벤트가 펼쳐질까. 아니면 그 사이에 폐허가 된 자영업과 경기가 휘청휘청 넘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게 될까. 당연하다는 듯이 올해가 끝나간다, 코로나 시대도 결국에는 지나가겠지.


------------

그리고 진짜 올해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이 글을 올린다. 묘한 기분이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정말 끝이다. 12월 31일, 오늘 확진자수는 967명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이 길고 춥겠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