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킨스데이 May 13. 2024

어느 날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어서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불현듯 '김밥'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달콤 짭조름하면서 밥과 각종 재료에 김이 어우러져 한 입에 쏙 넣어먹는 그 맛이 왜 떠올랐을까? 소풍날도 아닌데 말이다. 결코 한국이 그리워서는 아닐 것이다. 그동안 뉴질랜드에서의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에서 한국에 대한 향수는 딱히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나는 충분히 여기 삶에 만족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음식을 먹고 싶으면 오클랜드나 웰링턴 수준은 아니지만 타우랑가에서도 슈퍼마켓에서 김치나 한국 인스턴트식품을,  한인마트가 두 군데나 있었고 K-치킨이나 K-핫도그도 먹을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김밥’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타우랑가 CBD에 있는 한인 마트에 갔다. 한국에서 김밥을 만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직접 김밥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tvn <어쩌다 사장>이란 예능 프로그램에서 미국 아시안 마트에서 연예인들이 하루에 300줄가량의 김밥을 열심히 싸는 모습을 보고 결코 초보에게는 쉽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변명일 수 있지만 내 수중에는 밥솥도 김발도 없고 김, 당근, 우엉, 시금치, 단무지, 어묵, 게맛살 등 각종 재료를 일일이 준비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에너지 측면에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대신 미국에서는 없어서 못 판다는 ‘냉동 김밥‘을 한인 마트에서 찾아보았다. 다행히 아이스크림 냉동고에 냉동김밥 여러 종류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우엉유부김밥을 골랐다.


한인마트에서 구매한 냉동 우엉 유부 김밥 © 2024 킨스데이  
전자렌인지를 돌린 후의 우엉유부김밥 © 2024 킨스데이

   

  집에 돌아와 포장지를 꼼꼼하게 읽은 다음 전자레인지에 3분간 돌렸다. 오랜만에 익숙하게 맛있는 김밥 냄새가 주방에 솔솔 퍼졌다. 그런 다음 하얀 접시에 하나씩 담아서 김치와 함께 플레이팅을 했다. 밥보다 속재료가 더 많아 비주얼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젓가락으로 김밥 한 개를 집어 후후 분 다음 입 안에 쏙 넣었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김밥의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짭조름하면서 달달한 우엉과 유부, 당근과 시금치에 단무지까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괜찮은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거지. 이 맛이야. 비록 야탑역에서 노부부가 30년 넘게 즉석에서 말아준 유부김밥의 맛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뉴질랜드 타우랑가에서 이 정도의 맛을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다.

  



  해외에 있으면 가끔씩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이 있다. 오래전에 미국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갑자기 '팥빙수'가 먹고 싶었다. 당연히 꾹 참고 잠을 청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성경공부를 같이하는 한국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주말에 다 함께 버지니아의 한인 베이커리 샵에서 팥빙수를 먹을 수 있었다. 아마도 미국에서 먹은 팥빙수 그릇이 내 평생 한국에서 먹은 팥빙수 그릇보다 배는 더 많았을 것이다. 또 한 번은 물회나 회무침 같이 상큼하면서도 매콤한 그런 맛이 당길 때가 있었다. 이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포기해야 했다.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당연히 아니었고 식재료를 구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 당시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미국 지역에서는 물회를 팔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한류 문화가 확산되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귀국해서 가장 먼저 주문했던 배달음식이 바로 물회였다. 작년 말 뉴욕 어느 한식당의 메뉴 '물회면' 요리가  올해 최고의 요리로 선정되면서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다. 교포들이나 유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한식 옵션이 추가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상처가 있는  핀란드 사람과 일본 사람들이 모여 ‘오니기리’를 함께 나눠먹는 장면이 나온다. 평범한 음식을 통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오니기리. 김밥과 물회, 팥빙수가 어쩌면 나에게 그런 존재였을까? 상처 치유처럼 거대 담론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그런 흔한 음식들이 외국에 머물면서 누군가와 소통하고 이해하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클랜드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요리를 뚝딱뚝딱 잘하는 친구가 "이런 거 먹기 힘들지?" 하면서 떡볶이를 직접 요리해 줘서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오클랜드 왕마트가 워낙 다양한 한식재료를 취급해서 그 친구는 장을 봐두었다가 한식 요리를 곧잘 집에서 해 먹는 것 같았다. 그녀의 키위 남편과 아이도 한식을 좋아했다. 나도 이제는 미루지 말고 집에서 직접 김밥을 만들어야 봐야 할까? 냉동김밥은 간편하긴 했지만 8~9 뉴질랜드 달러(원화로 6천~7천 원대)의 가격을 생각하면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어쩌다 사장>에서는 즉석에서 만든 김밥 한 줄이 2달러(원화로 2천 원대 후반) 였는데. 전기밥솥이 없어도 햇반으로 하면 되니 다음에 한인 마트에 가면 몇 가지 김밥 재료를 사두어야겠다. 쟁여놨다가 인스타에 떠도는 간단한 레시피를 골라 한 번 도전해 봐야지. 옆집 가족과 포트락 파티를 할 때 김밥을 만들어서 11살짜리와 5살짜리 꼬마 아가씨들에게 한국 음식 문화 체험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미 조미김과 고구마깡의 매력에 빠지게 했으니. 비공식 K-푸드 앰배세더로서 주변에 천천히 스며들듯이 한식을 전파하면서 친분을 도모해보려고 한다. 그게 또 선(국경)을 넘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책무가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