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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주민 Mar 09. 2022

Choice, 대선

#1

2002년, 성인이 된 줄 알았으나 투표권 기준으론 미성년자였던 시절.


12월, 연말의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음미하며 명동 밤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거대한 인파와 맞닥뜨렸다. 투표도 못하는 데다가 정치 무관심층이던 때다. 그날은 16대 대통령 선거 전날이었다. 마지막 유세는 저녁, 주말이면 늘 북적이던 서울 중심지 명동이었다. 명동 하면 연상되는 콩나물시루 같은 인파를 지나, 저만치 앞에서 이회창 후보가 보였다. 대략 이런 말이 마이크를 넘어 들려왔다. “저는 키도 작도 몸집도 작지만, 국민 여러분을 위한 마음은 누구보다도 큽니다.....” 또랑또랑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꽉 찬 사람들로 인해, 한동안 한걸음도 이동하지 못한 채 한참을 기다리고 부대끼며 겨우 지하로 내려갔다.


그날, 노무현 후보는 보지 못했지만, 나의 청년기는 그의 집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를 좋아했던 시절도, 실망하고 비판했던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그가 퇴임한 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던 해,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이다. 수업을 담당하던 강사 선생님에게 “오늘, 광화문에서 영결식을 한다고 하는데, 수업을 합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나를 뭘로 보고!”라고 말했다. 그날 수업은 없었고 현장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2007년, 처음으로 대선 투표권을 행사하던 날, 내가 뽑았던 소수정당 후보의 마지막 유세 장소도 명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명동은 피날레의 장소는 아닌듯하다. 이재명 후보는 광화문 청계광장을 거쳐 홍대 앞에서 마무리, 윤석열 후보는 건대입구와 강남역, 심상정 후보는 신촌을 거쳐 역시 홍대에서 선거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때의 명동은 오늘의 홍대로 넘어온 것일까. 정치인들은 사람들과의 밀도 높은 접촉을 좇는다. 장소와 명칭은 그대로 여전히 있으나, 세월에 따라 사람들이 찾는 발걸음은 현저하게 변했다.



#2

나는 1번 후보를 뽑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기본소득. 지금 나는 기본소득이 ‘대안’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한때는, 매우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는 사회정책이라고 생각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던 대학시절 처음 접한 이 이론은 당시만 해도 매우 급진적이거나 유토피아적으로 보였다. 이후, 4차 산업혁명이니 노동의 미래니 하는 전망 속에 기본소득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긴 했지만, 상당 부분 아이디어, 실험 차원에서였다. 이 후보는 이를 정치의 영역으로 들고 나와 (낮은 수준이고 부분적이긴 했지만)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내걸고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실행했다. (유력)정치인이 많은 논란을 부를 수 있는 기본소득을 저렇게 앞에 내세우며 실행까지 이어서 한다? 그러한 이슈 선점력과 실행력은 정치, 행정가로서의 그를 눈에 띄게 했다.


두 번째는 (행정)조직 장악력. 30대를 이런저런 ‘민관’ 협력 거버넌스라 불리는 사업을 접하며 지내온 나는, 행정 조직과 구성원을 이끌고 움직이게 만드는 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자주 느꼈다. 수장 하나 바뀐다고 다가 아니다. 결국 일은 일선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이들을 제대로 리드하고 선출된 리더(좋은 의미로 민주적 통제 권한을 지닌 자)의 의중에 따라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중요한 자질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후보는 적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3

무엇보다, 현시점에서 최소한 ‘저쪽’보다는 나을 거 같다는 것. 그래도 당선 가능한 선택지라는 것도.


기실 대의제, 선거라는 , 그렇게 민주적인 제도는 아닐  있다. 특히 우리와 같은 양당으로 귀결되는 체제는 결국 자장면, 짬뽕  중에 하나 고르는 정도에 그친다.   싫을 수도 있다. 하나가 괜찮긴 한데 최선은 아닌 차선이거나, 그나마 저쪽보다는 나은  같으니 차악으로 택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나는 당선권의 후보보다 그렇지 않은 후보를 뽑은 적이  많았다. 당장의 ‘당선  아닐지라도, 중장기적으로 우리 사회를 위하면서도 최소한의 나의 취향과 자존을 택하고 지키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All or Nothing 양자택일 경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심화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막연한 이상주의도 감소한다. 나는 이제 결과와 상관없이 ‘그냥표를 주는 것보다는  이상이 있어야 택하는 경향이 늘었다. 물론 지더라도 마음에  동요되는 무언가가 있으면, 여전히 그대로 따르겠지만.


그래서다. 최소한 스스로가 뽑고 싶은 선택지를 선뜻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가는 게 필요하다. 출마자들도 구도와 진영논리에 따라 표를 가지고 온답시고 변신을 거듭해야 이긴다. 지면 아무것도 없는 쪽은 허울뿐인 단일화로 강제당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설득하고 연대해도 Nothing이 되지 않게끔 판을 바꿔가는 게 옳지 않을까. 미국, 영국 정도가 우리와 유사한 양당 질서일 텐데, 이들은 그렇게 민주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로 볼 수는 없다. 여러 개의 선택지가 있어 뽑고 싶은 선택지를 고르고, 선택을 받기 위해 혹은 선택을 받은 후에 적절한 수준에서 연합을 하고, 그들이 같이 운영하고 책임지는 뱡향으로 바뀌어 갔으면 한다. 누구나, 그래도 자기 의사에 따라 최선에 가까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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